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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l 25. 2024

무력감이 지배하는 삶

 무력감은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어디에 묶여있는지 알 수가 없다. 끊고 도망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국 원인과 해법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해결하려는 굳은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다. 벗어나려는 저항이 강할수록 반작용으로 찾아오는 무기력 역시 강해진다. 처음부터 무력한 인간은 없다. 번아웃은 의욕적인 사람들을 괴롭힌다. 우울감은 열망과 희망의 어두운 부산물이다. 의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성장하면서 인간은 욕망에 현실적으로 타협한다. 아이들조차 원하는 장난감을 전부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포기할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미련이 남더라도 놓친 것들은 보내준다. 기회와 사람 그리고 열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머리가 내린 결정을 가슴이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속도차가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마음은 정반대로 괴롭다.


 따로 노는 머리와 가슴의 불협화음에 시달리다 보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선택을 후회하면서 죄책감과 우울감에 빠질 수도 있다. 괴로운 마음을 주변에 이야기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복잡한 내면의 지형도를 상세하게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듣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을 가늠하는 난해한 과정을 겪다 보면 지친다. 그래서 조용히 입을 닫는다. 배려와 존중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친절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감보다 비난이 쉽고 교감보다 증오가 편한 세상이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는 내면에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 마음을 흔든다. 무력감에 시달리는 이들의 나약한 의지를 비난하고 위로를 가장한 훈수로 상처를 준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져 내리면서 무기력은 내면을 완전히 잠식한다. 그때부터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겉으로 괜찮은 척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또렷한 경계선을 긋는다.


 하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시간이 지나면 세상과 나를 단절하는 벽이 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고립된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다. 우울감은 염세적인 사고를 낳고 무기력은 삶의 의지를 앗아간다. 기분은 태도가 되고 감정은 편견이 된다. 뒤늦게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익숙함에 적응하게 되면서 인간은 환경에 순응하는 존재로 변한다. 무력감은 시간이 지나면 정서적인 디폴트값으로 자리 잡는다. 자발적인 거리 두기는 예상과 다르게 심리적인 고립을 초래한다.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무력감은 더 심해진다. 시험이라면 풀기 힘든 문제를 과감하게 넘길 수도 있다. 타협할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것도 전략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포기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없다. 인생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은 괴롭다. 남이 하면 무조건 너도 따라가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살았다. 남들만큼 살지 않으면 낙오자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혼란 속에서 무력감은 가슴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삶의 의지를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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