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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Aug 04. 2024

고립된 섬

삶을 버리고 증발하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면서 알게 된 친한 동생은 3년 전 소식이 끊겼다. 카톡을 탈퇴하고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그대로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증발해 버렸다. 어디서도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을 피해서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을 무렵 그녀는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녀는 벗어나기 힘든 늪에 빠졌다. 사람 인생이 한순간에 달라진다는 말은 좋은 쪽이나 나쁜 쪽이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꾸는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력은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보상심리로 이어졌다. 삶은 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자기만족으로 끝났다면 불행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과 욕망과 그리고 후회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존재다. 벌어질 일은 다른 길로 돌아가도 벌어진다. 외모를 열심히 가꾸는데 들어가는 열정만큼 욕심의 크기도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다. 홀린 것처럼 단숨에 결혼까지 감행했다.


 드라마 같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장르는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었다. 남자는 허풍쟁이였다. 사실이라고 말했던 것들은 과장이거나 확인할 수 없는 주장에 불과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전부터 몇 차례 경고를 보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지인들까지 우려를 나타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막았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본인의 선택을 고수했다. 그녀는 사람들을 버리고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그래서 상황이 악화됐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결혼 전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좀 더 고민해 보고 신중하게 생각해 볼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후로 1년 정도 연락이 끊겼다.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그녀는 돈을 빌려줄 수 있냐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지난 1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삶이 버거우면 자진해서 고해성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고백은 알아서 흘러나왔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유약한 존재다.


 남편이 하던 사업이 실패해서 큰 빚이 지게 됐다는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다. 파산이나 회생을 알아보고 있다는 대답은 생기나 온기가 없었다. 불과 1년 만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여유나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불안과 초조가 눈 밑에 그림자처럼 들러붙어있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앳된 모습이 꼭 거짓말 같았다. 그녀는 퇴근을 하고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카페인 음료를 마시면서 수면부족을 이겨낸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주말근무를 자원해서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남편은 신혼생활 내내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다. 급한 불을 끄려고 은행대출은 물론 사금융까지 손을 댔다. 그러나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이 시작되면서 재기하려는 의지는 꺾여버렸다. 사업을 그만두고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한동안 방황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지인의 소개로 물류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밤낮으로 일해서 대출이자만 겨우 갚고 있다는 말이 무겁게 들렸다. 내가 건넬 수 있는 것은 위로뿐이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녀는 자취를 감췄다.


 SNS를 탈퇴했고 오랫동안 써온 번호까지 없애버렸다.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아마 직장도 그만두었을 것이다. 사라지기 전의 상황은 고립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직장에서도 본인의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을 내팽개치고 사라지는데 미련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증발하는 사람들은 극심한 무기력에 빠져있다. 그녀가 짊어진 스트레스와 우울감은 말할 수 없이 무거웠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의지는 한순간에 꺾인다.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용기는 사라진다. 사람마다 내구도는 다르다. 의지를 잃어버리면서 미련도 걱정도 다 내려놓았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말은 덤덤하지만 그 말이 단호하면서도 처절하게 들렸다. 나를 포함한 몇몇 지인들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과거의 삶이 떠올라서 그랬던 것일까?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실패하고 극복하는 방법 역시 다채롭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허우적대다 자리에서 밀려나기도 한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삶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는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고 무탈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비극은 잘못된 선택과 함께 시련을 몰고 왔다. 버거운 하루하루를 이겨내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반전은 없었다.


 한 번 어긋난 생활은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산중턱에서 정상까지 가는 것보다 입구에서 중턱까지 가는 길이 더 힘들다. 떨어지는 속도는 빠르지만 올라가는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적지는 더 멀게 느껴지고 몸과 마음이 쉽게 지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주 먼바다의 섬을 상상한다. 육로도 해로도 없는 숨겨진 섬. 그녀는 그 섬에 있다. 누구도 찾아갈 수 없는 그 섬에서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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