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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11. 2024

걷어낼 수 없는 내면의 그늘

 걱정이나 불안은 고정된 기후와 같다. 감정은 계절처럼 주기적으로 변하지만 기후는 환경을 지배한다. 시간이 지나도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걱정은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그림자는 해가 떠도 물러나지 않는다. 등잔 밑이 제일 어두운 것처럼 행복을 경험할수록 불안의 심지만 두꺼워진다. 걱정과 불안이 만드는 그늘은 사람의 고유한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삶에 녹아든다. 노력으로 만든 습성은 타고난 천성을 이긴다. 하지만 살아온 환경의 색으로 물든 본성은 별개다. 성과는 역량이 만드는 결과물이지만 마음가짐은 태생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이 일상이 된 삶을 살다 보면 흔적이 남는다. 감추려 해도 가릴 수 없고 씻어내고 싶어도 감출 수 없다.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멍이 되거나 짐이 된다. 아프고 괴로운 순간들이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발버둥 치면서 기를 쓰고 저항하지만 현실은 거를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단단하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를 떼고 달아날 수는 없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바람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꿈이나 성공보다 평범한 삶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품게 된다. 하지만 본성은 관성이다. 살면서 보고 자란 것들은 내면에 깊게 뿌리를 박고 나를 과거로부터 놔주지 않는다.


 나보다 앞서 살아온 이들의 굽은 등을 본다. 풍파를 견뎌낸 넓은 등은 세월의 풍화로 인해 앙상하게 말랐다. 평생을 노력했지만 남은 것은 작은 방 한 칸이 전부다.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은 운명으로 만든 관이다. 그 속에서 살아온 삶은 시대는 달라도 비슷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까? 바닷물처럼 밀려드는 걱정과 불안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돌이켜보면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눈밑에 드리운 그늘은 삶을 감싸고 있는 짙은 어둠과 같은 색이다. 다림질을 해도 내면의 그늘이 만드는 구김살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름은 잠시 펼 수 있지만 그늘은 걷어낼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얻은 시행착오는 가치 있는 경험이 됐다. 달라진 것도 있지만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았다. 때는 벗길 수 있지만 얼룩말의 무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가짐을 두고 노력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차피 인간은 겪어보지 못한 삶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상상할 뿐이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이들은 긍정론을 논하면서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철저한 독립시행이다. 비슷해 보일 뿐 똑같은 삶이나 상황은 없다. 내가 낸 해답이 상대방의 인생에 정답이 되지 않는다.


 기후가 다르면 사는 삶도 다르다. 눈이 많이 내리는 극지방과 여름날씨만 이어지는 적도는 정반대다. 같은 하늘 아래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기후에 따라 세상을 대하는 온도차가 발생한다.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옥상에서 보이는 전망은 1층에서 볼 수 없다. 그래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생각보다 자주 오해를 낳는다. 긴말로 해명하고 본심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말은 가슴에 닿지 않는다. 초라한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서로의 빈곤한 상상력을 확인하고 점점 멀어진다.


 소나기처럼 찾아오는 무기력은 우울감의 범람으로 이어지고 일상은 통째로 잠겨버린다. 주변에 이야기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비슷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잠그고 산다. 미로를 헤매면서 방황하지만 매번 출발선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등속운동을 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나를 추격하는 과거와 내게서 도망치는 미래를 사이에 두고 현재는 갈수록 피폐해진다. 외로움 속에서 쫓고 쫓기는 삶을 사는 추격자이자 도망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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