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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7. 2024

긴 발톱

 씻고 나와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다가 발끝에 눈길이 닿았다. 긴 발톱이 보였다. 자를 시기가 한참 지났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발톱을 다듬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양말이 구멍 나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다. 머리는 짧게 자르고 수염은 거울을 볼 때마다 잘랐는데 발은 미처 못 보고 지나쳤다. 요즘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잘 모르겠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다. 하얀 반달이 올라온 발톱을 보고 갑자기 <남산의 부장들>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통령을 암살하고 차에 올라탄 주인공이 구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봤는데 지금은 주인공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쌓인 눈 위에 폭설이 내린다. 물기를 머금은 습설은 단단하게 얼어붙는다. 설상가상. 안 좋은 일은 같이 온다. 계절처럼 힘든 시기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별개다. 가슴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공허감이 찾아오면 바닥이 꺼지면서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상담을 받았다. 속에 담아둔 말을 꺼내놨다. 말하는데 30년이 걸렸다.


 이제부터 천천히 받아들이려면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 고민하지 말아야겠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지면 기운만 빠진다. 1시간에 한 번씩 자다 깬다. 꿈을 많이 꾼다. 기억에 남는 꿈은 없다. 깨고 나면 시계부터 본다. 밤은 길고 맘은 괴롭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는 까먹고 지나가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살면 뭐가 뭔지 모르고 지나친다. 적당히 허기를 달랠만한 양의 밥을 아무렇게나 입으로 밀어 넣는다. 삶의 의지는 밥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안다. 어떻게 해서든 끼니는 거르지 않고 챙기는 중이다. 집 앞 분식점에서 매일 김밥을 사다 먹는다.


 물 위에 뜬 나무이파리처럼 살고 있다. 벗어나고 싶어도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속절없이 떠밀려가는 중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벌써 늦은 저녁이다. 밀려오는 걱정을 피해 도망 다니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불안과 맞서 싸우다 지칠 때쯤 잠자리에 든다.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후로 친구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줬다. 내 상황을 아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나마 좀 낫다. 거의 매일 같이 저녁을 먹는다. 마음이 너무 힘들 때는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 덕분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찾아오는 우울감을 이겨낼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심은 접었다. 의지로 단 번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은 조바심이다. 트라우마와 같은 상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상담전문가로 일하는 대학교 동기는 한 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문제를 받아들이는데 오래 걸린 만큼 인정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나는 늘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의 일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쌓인 상처와 고통이 불혹을 목전에 두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순식간에 일상이 휩쓸려나갔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었다. 책임감을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다그쳤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다들 힘든 상황이라 그냥 혼자 감내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위기신호를 감지하고 급하게 주변에 SOS를 보냈다.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몇 명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그때 입을 닫고 고립된 채 있었다면 망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번 주의 나는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일어나서 거울을 보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거실로 나가서 밥솥에 남은 밥을 긁어다 볶음밥을 만들어먹었다. 옷을 갈아입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깨끗하게 씻었다. 하지만 발톱을 볼 생각은 못했다.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공허감과 불안감에 맞서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도 받아들이는 시도를 하려고 노력 중이다. 수십 년간 쌓아놓고 있었던 문제를 금방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렵다. 갑자기 무너질까 봐 무섭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더 괴롭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천천히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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