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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7. 2024

상처투성이 아이는 상처를 품은 어른이 됐다

 두려움은 늘 무지에서 온다. 막막하고 공허한 감정의 의미를 몰라서 고통스러웠다. 내가 왜 힘든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괴로웠다. 막막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를 찾으려고 과거를 헤집을수록 더 괴로워졌다. 오래된 기억 아래 묻혀있던 상처가 하나 둘 딸려 나왔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픔은 그대로였다. 가벼운 상처는 없다. 괜찮다는 말은 남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트라우마는 흔적으로 남는다. 흉터는 아문 것처럼 보이지만 눌러보면 통증은 여전하다. 내면으로 향한 시선을 성장기로 돌렸다. 대부분의 문제는 성장기에 내재되어 있다.


 몸은 자라 어른이 됐다. 이제 곧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겁이 난다. 과거를 모른 척 덮어놓고 살았다. 성장기 내내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모범생처럼 지냈다. 점잖고 예의 바르다는 말을 선생님이나 주변 어른들에게 많이 들었다.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산 적이 없었다. 뼈대 있는 유교집안의 목사였던 아버지는 양가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나는 늘 올바른 아이로 지내야만 했다. 아버지의 교회는 교세가 매년 기울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즈음 교인들은 거의 다 떠났다. 고난은 늘 함께 온다. 교세가 기울더니 교회는 결국 문을 닫았고 가세도 기울었다. 안 좋은 일은 연달아온다. 겨울 방학 내내 친척 집에서 지냈다. 벌써 20년이 넘은 옛날 일이지만 생생하다. 친척들은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줬다. 그 손길을 동아줄처럼 단단하게 붙잡고 겨우 버텼다. 그때 나는 13살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괴롭고 외로웠다. 트라우마는 흉터가 아니라 상처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와 함께 계속 존재할 것이다.


 괴로운 기억을 덮어놓고 지냈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억지로 괜찮은 척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산처럼 높게 쌓였다.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아무 문제없다고 여겼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엄살 부리지 말자고 늘 스스로를 다그쳤다. 무력감과 우울감을 달고 살았다.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내 이야기를 말할 용기가 없었다. 겁쟁이였다. 주변 지인들의 고민이나 가정사를 잘 들어주면서 정작 나는 닫아놓고 살았다. 지난 일이라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아무 문제없다고 여겼는데 내가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상처가 다 아물었다고 멋대로 판단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인정하는 것은 두렵고 받아들이는 일은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나를 속이고 사는 것을 선택했다.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린 시절로부터 이어지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결국 과거는 상처로 남았다. 아픔 없는 인생은 없다. 사는 일 자체가 힘들다. 가벼운 상처는 없다. 모든 고통은 똑같이 아프다. 더 낫고 덜한 것은 없다. 아픔은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아프면 그냥 아픈 것이다. 상처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해법을 찾는다. 긍정적이고 밝게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탐닉했다. 틈만 나면 책 속으로 도망쳤다. 책을 읽으면서 외로움과 괴로움을 잊었다. 책 속에서 친구를 만났고 스승을 찾았다. 현실에서 일찌감치 잃어버렸던 희망의 질감을 확인하고 의지했다. 학교에 남아 도서관이 닫을 때까지 책을 봤다. 독서에 몰두하면 아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고통을 이겨내려고 책 읽기에 매달렸다. 나는 상처 위에 지식을 쌓았다. 괴롭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성장기 시절의 나는 방황할 용기도 없었고 반항할 기력도 없었다. 구체적인 꿈보다 막연한 도피를 꿈꾸며 살았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파고들었다. 시와 소설 그리고 수필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림을 접하게 되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그림 속에 담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그렸다.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그림 속에 담았다. 행복, 온기, 온정 같은 감정을 원했지만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찬란한 별과 아름다운 꽃을 가득 그려 넣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행복해지길 바랐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마음에 병이 든 후에야 뒤늦게 과거를 돌아보는 중이다. 상처투성이 아이는 자라서 상처를 품은 어른이 됐다. 여전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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