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안함

구식이 아닌 클래식

by 김태민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못 보던 상자가 있었다. 상자의 정체는 일본에서 날아온 온 택배. 발신인에 적힌 친한 동생의 이름을 확인하고 상자를 열어보니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쌓인 지갑이 나타났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늦은 선물을 보낸다는 카드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걸어 선물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을 전했다. 동생이 해외로 이직을 준비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든 다기에 작게나마 도움을 주었었는데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지갑을 선물한 것이었다. 때마침 지갑을 새로 바꿔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필요한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4년간 사용한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씩 꺼내 새 지갑에 꽂아 넣었다. 볼록했던 옛날 지갑이 금세 홀쭉해졌다. 대학 동기에게 선물 받은 지갑이라 아껴가며 잘 썼는데 4년 사이 꽤 낡아버렸다. 안감은 여기저기 닳아 코팅이 벗겨졌고 여닫는 부분의 주름도 잘게 갈라져버렸다. 손에 익은 물건은 오래된 것에서 비롯되는 편안함을 품고 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갖고 있는 존재감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새 지갑은 장인이 직접 손으로 바느질을 해가며 만든 질 좋은 명품이었다. 비싼 가죽을 사용해 만들었고 모서리부터 지갑 안쪽까지 바느질은 빈틈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새 물건 특유의 빳빳함은 손에 착 감기는 맛이 부족했다. 옛날 지갑처럼 손에 익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익숙한 물건을 사용할 때 느끼는 편안함이 좋다. 오래되고 조금 낡았어도 손에 익은 자연스러움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손이 더 자주 가는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절친 하나는 17살 때 산 야구 모자를 아직까지 쓰고 다닌다. 대학 동기는 스무 살에 처음 아르바이트를 해서 장만한 가방을 요새도 종종 들고 다닌다. 낡고 오래된 것들에 깃든 추억과 의미는 철저히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남들에게 ‘이제 좀 버려라.’ 라는 말을 듣게 만드는 물건들은 정작 당사자에게는 애정이 담긴 각별한 보물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어딜가나 가지고 다니는 인형이나 담요처럼.
 
 더 좋은 것을 사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 받더라도 왠지 모르게 계속 찾게 되는 그런 매력을 지닌 것들 가운데 낡은 넥타이가 있다. 나는 대학 시절 처음 샀던 9500원짜리 니트 타이를 자주 애용했다. 짙은 갈색의 넥타이는 어떤 셔츠에든 무난하게 잘 어울렸고 오래 사용해서 그런지 매듭을 만들 때 손에 감기는 익숙한 느낌이 참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10만원이 넘어가는 좋은 넥타이들을 구입하는 일이 늘어났지만 정작 가장 많이 메고 다녔던 타이는 9500원짜리 니트 타이였다. 오래 되서 좋았고 낡으면서 정감이 갔다. 너무 자주 하다 보니 결국에는 올이 풀리는 바람에 버렸지만 지금까지도 그 니트 타이만큼 손이 가는 넥타이는 없다. 폴리에스터로 만든 싸구려 타이가 적어도 내게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었던 것이다. 
 
 빈티지와 클래식은 꼭 오래된 와인과 유서 깊은 명품에만 붙는 것은 아니다. 손때가 묻고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면 평범한 것도 빈티지가 되고 사소한 것 역시 클래식이 된다. 내가 걸어온 시간과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나의 역사라면 손에 익은 오래된 물건들은 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편이라 그런지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고입을 앞두고 중3 겨울방학 때 엄마가 사뒀던 카키색 머플러를 겨울이면 지금도 목에 두르고 다닌다. 음악에 빠져 살던 고등학생 시절 처음 아르바이트를 해서 샀던 헤드폰 역시 아직까지 잘 쓰고 있다. 손에 익은 물건들을 쓰다보면 오래된 추억들이 종종 생각난다.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들과 만든 추억이 아름답듯 낡은 물건들이 느낄 수 있는 추억 역시 아름답다. 
 
 새로움이 주는 신선함만큼 낡은 것이 주는 편안함도 매력적이다. 유행도 변화도 급속하게 이뤄지는 시대를 살면서 오래되고 낡고 조금은 불편한 것들에 기대 편안함을 느낀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을 지켜온 것들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이 든든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음이 불안할 때면 주머니 속의 낡은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꼭 맞은 느낌과 익숙한 촉감에서 오는 안정감이 높게 솟아오른 심장박동수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오래된 것들은 특별하지 않아서 각별했고 새롭지 않아서 편안했다. 좋았을 때나 나빴을 때나 늘 지니고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이 평범한 물건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깊은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괜찮아질 거라는 한 마디를 나는 낡고 손에 익은 물건을 통해 전달받았다. 
 
 그래서 오래 사용한 물건들을 처분할 때는 왠지 모를 섭섭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20대 후반을 함께 보낸 지갑을 깨끗하게 마른 천으로 닦아 상자에 넣어 리본을 묶었다. 쓰레기통에 바로 넣어버리는 것은 조금 매정한 느낌이라 작은 상자에 담아 분리수거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예전보다 조금 희미해진 20대의 기억도 지갑과 함께 놓아두고 돌아왔다. 주머니 속의 선물 받은 새 지갑 귀퉁이의 빳빳함이 손끝에 느껴졌다. 내 손에 꼭 맞는 부드러운 촉감을 선사할 때까지 늘 몸에 지니고 잘 사용해주어야겠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날들을 함께할 조용한 동반자를 맞이한 하루. 언제나 그랬듯 안녕은 또 다른 안녕으로 이어짐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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