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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KIM May 09. 2020

초상화를 그립니다

주희 씨 이야기

 

제 작품입니다


 

 질문이 많으면 귀찮은 사람이 됩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이점을 확실히 알려 줍니다. 에디슨도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가정교육으로 대신했다고 하니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저처럼 눈치 빠른 아이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게 됩니다. 몰라도 아는 척하는데 선수가 되는 거죠. 가만히만 있으면 갈 수 있다는 그 "중간"이라는 지점에서 일생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찮게 나서지 마라"를 뒤집어 보면 나서지만 않으면 귀찮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질문만 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편리를 제공하는 그 회색 지대의 안락함에 꽤나 젖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종종 실수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미처 상대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내버리지요. 머리를 끄덕인다던가, 그렇죠, 맞죠, 하는 맞장구를 치면서 말입니다. 나는 눈치가 빨라서 당신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알겠다는 대단히 건방진 몸짓을 해버리는 겁니다. 듣는 인간이라 자부하면서도 실은 걸러 듣는 인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그러니까 몰라도 아는 척하는 이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몰라도 아는 척하는 단계가 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진짜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급우가 왕따를 당해도, 동료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돈과 권력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유린해도, 우리는 부조리 앞에서 알아도 모르는 척합니다. 단체 생활에서 튀는 아이를 우리는 모난 돌에 비유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는 창의성이야말로 미래의 자산이라며 창조경제 같은 담론을 꺼내곤 하지요. 담론의 핵심인 혁신과 창조에 대한 평가는 모난 부분 하나 없이 다듬어진 공무원들에게 맞깁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마냥 비꼬아서 해결될 것만도 아닐 테고요. 다만 사회의 고정관념이 전향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는 전두엽이 척출된 클론을 계속해서 생산하지 않을까요? 딱 저처럼 고개나 미리 까딱이는 그런 존재들 말이지요.


스튜디오에서



주희 씨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했습니다. 덕분에 약간 분주해졌습니다. 왜인지 저는 제가 바쁠 때 곁에서 건네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으며 준비할 수도 있을 텐데요. 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일을 처리하면서도 대화를 능숙하게 이어가는 프로페셔널한 주인공들이 나오지 않나요? 안타깝지만 그렇게 분주할 때는 전매특허인 고개 까딱이기조차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가 언프로페셔널 합니다. 아무튼 서둘러 커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물감을 짜고 카메라 세팅을 마쳤습니다.


사람의 언어는 다양합니다. 음성언어만으로 텍스트를 전달하는 건 아니지요. 몸의 언어라는 게 있습니다. 특히 얼굴의 표정은 매우 효과적인 의사소통 매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인상은 어쩌면 가장 강력한 언어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도 하나의 표정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셀 수 없는 표정을 가졌습니다. 스스로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그 변화의 전체적 양태 속에서만이 한 명의 인간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인상은 예단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첫인상을 신뢰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하찮은 인간인지라 종종 실수를 저지릅니다. 얼마 전 한강 공원을 갔을 때였습니다. 풍선, 연, 장난감 등을 늘어놓고 파는 건장한 청년이 있더군요.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거구의 몸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애들을 위협해서 팔 셈이냐. 저 풍선들은 구입하자마자 바람이 빠질 것이고 항의하러 온 아이들에게 태연히 새 풍선을 팔겠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 무렵, 할머니 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실은 할머니가 주인이었고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곳을 지켜준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첫인상은 이런 겁니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저는 관찰이 특기입니다. 특기가 상당히 많지요. 하찮은 인간 특유의 행동양식입니다. 특히 강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은 제게 있어 좋은 관찰의 대상입니다. 일생 동안 관찰을 시행한 연구자로서 한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인상이 강한 사람들이야말로 첫인상의 피해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저 청년처럼 말이지요. 대단한 연구 성과이지 않습니까? ...... 죄송합니다.


질문이 많고 솔직하다는 이유로 불우(友) 했던 어린 시절, 신생 학교에 입학해 선배 없이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 1년간의 대학 교환학생, 그리고 끝내 성공하지 못했던 결혼 준비의 과정. 몇 가지 커다란 삶의 흔적이 그녀의 얼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친구라고 믿었던 존재가 자신을 외면했던 경험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지요. 선배가 없었기에 왜 공부를 하는지, 왜 시키는 대로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마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1년간의 교환학생 시절이 아니었을까요? 미국으로 교환학생이 되어 떠나며 그녀가 했던 다짐은 하나였습니다.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리라. 그리고 그녀는 실천했습니다. 다양한 연애, 최대한의 파티, 공짜 술을 거부하지 않는 예의를 배웠지요. 그녀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관념들을 실재화했던 시간들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랑은 많은 걸 변화시키지요. 그러나 저는 사랑의 아픔이 없는 존재에게 왜인지 모를 측은함을 느낍니다. 크든 작든 이 아픔은 한 번은 반드시 겪어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너무 큰 상처였기에 아직까지도 여파가 남은 주희 씨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요. 저는 여전히 주책이 없습니다.


여행 갈 때 애용하는 보스턴백


그림을 그리던 중 주희 씨가 동료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생님 중 한 분이 분명 한국 출신인데 교포인 척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출근할 때마다 커다란 보스턴백에 뭔가를 잔뜩 넣어 온다고 합니다. 교재나 참고 자료 같은데 아이들 수업에 너무 과하다는 거죠. 수업도 너무 깊이 들어가서 흥미가 떨어진다는 평이 있다고 합니다. 주희 씨는 이분을 관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동료분이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분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무엇인가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 방어기제로 저런 행동양식을 선택했겠지요. 어리석다면 어리석을 수 있는 방식이지만 누구나 현명할 수는 없겠지요. 때로는 저런 부분이 커다란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이 다른 선생님들보다 더 성실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영어를 문법적으로 깊이 배우고 싶다면 이 선생님이야말로 좋은 선택이 되겠지요. 물론 졸음 방지용 물파스와 함께라면 말이지요.


저는 소설과 영화 등 서사를 다룬 모든 장르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 작업에서도 서사를 다루죠. 저는 주희 씨의 동료분을 훌륭한 캐릭터로 느꼈습니다. 한 번 만나서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만큼요. 관찰자의 시점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모든 사람에게서 내 존재를 발견합니다. 거기서 연민을 느끼거나 아니면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요. 싫은 것도 좋은 것도 내 모습인가 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관찰을 받아온 삶에서 관찰자가 되어가는 삶이 아닐까요? 이제 주희 씨도 나이를 먹어가는 듯합니다.


초상화를 그린다는 건 누군가의 얼굴을 선택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최대한 조심하려 하지만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건네는 눈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그녀의 얼굴로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그녀의 색들을 결정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주희 씨에게 정중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서 말이죠. 고맙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앞으로 할 수 있는 한 꾸준히 해볼 요량입니다. 당신 삶의 이야기는 그림과 글, 그리고 유튜브 영상을 통해 남겨질 예정입니다. 물론 민감한 이야기는 저만 듣겠습니다. 얼굴 공개를 꺼리시는 분들은 미리 말씀해 주시면 영상 또한 편집하겠습니다. 완성된 그림은 구매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어쨌거나 당신의 인생을 그리고 싶습니다. 가볍게 노크해 주세요. 

Link: instagram@woodyplanb


                                                                            - 작가 김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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