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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geun Jun 27. 2020

덩칫값을 못하게 됐어요!


요새 자주 아프다. 죽을 듯이 아프더라도 잠깐 자고 나면 말끔히 나았는데, 이제는 며칠 연속으로 아픈 게 꽤나 빈번하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며, ‘우근이는 희한하게 자주 아프네…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라 말한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맞는 편견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난 덩칫값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월요일이 되기 전 새벽,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연거푸 구토하였다. 전날 마신 와인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아니 취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러지…’를 4번 정도 되뇌며 속을 게워내니, 한결 몸은 가벼워졌고 출근을 다행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허나 이는 잠깐만 쉬면 괜찮아지던 옛날 내 몸 한정이었다.



일어나니 머리는 핑핑 돌아 도저히 회사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월요일 아침에는 팀 회의와 +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으니, 딱 그 일만 하고 반차를 쓸 생각으로 출근을 감행했다. ‘이렇게까지 직장을 다녀야 하나…’. 나 자신이 너무나도 안쓰럽게 여겨져 동대문역사공원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는 길에서 센과 치히로의 OST를 재생했다. 웅장한 듯 슬픈 멜로디는 나를 인간극장에 나오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줬다. 5호선의 굉음이 아니라면 감정 이입하여 울음이 터졌겠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 그럴 겨를마저 없었다.



오전 9시가 출근 시간인 회사에 딱 맞춰 도착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늦은 적은 없었는데... 여하튼 ‘나는 아프다!!!!!!!!!!!!!’라고 무언의 호소를 하며 무기력하게 팀원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털썩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과장님이 내 안색을 보고 알아봐 주셔서 괜스레 기뻤다.



출근하자마자 칼같이 진행되던 아침 회의는 입사 후 처음으로 연기되었다. ‘아니, 이럴 거면 휴가 쓸 걸!’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출근하고 나니 생각보다 몸이 괜찮아져 아까운 휴가 하루를 날리지 않은 나 자신이 기특해졌다. 그리고 내 월급을 영업일로 나눠 적은 숫자를 보며, 오늘 하루 희생을 정당화했다.



금융권의 가장 좋은 점은 점심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빠르면 11시 20분부터 오후 1시까지인데, 여의도의 수액 공장이라는 내과에 찾아갔다. 매우 형식적인 2분짜리 진료를 마친 채 수액을 맞았다. 그리고 1시간 동안 세상 꿀잠을 잤다. 영현이 집에서 암막커튼을 치고 자는 것보다 더한 꿀잠이었다. 60,000원의 스팀팩의 약효가 굉장하기보다는, 60-000원이라는 숫자가 플라세보 효과를 일으키는 게 더 큰 느낌이었다.


 

수액의 힘으로 밀린 일들을 완료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아침에 생각하던 반차는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남은 두 시간 동안 일을 더 해야겠지만, 그냥 하기 싫었다. 머리가 아파서 내 정신은 또 다른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나의 몸이 사무실에 왜 있는지조차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머릿속에서 소리치는 것 같았다. 



결국 아프니 해야 할 일은 모두 미뤄둔 채, 몇 개월 만에 오후 6시 칼퇴를 하고 여의도에서 혜화까지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아프지 않았으면 없을 택시비 15,000원은 분명 기회비용이었으나 올해의 소비임에는 분명했다. 난생처음 일곱 시 이전에 집에 도착했고 비록 아프지만 이 남은 시간이 오롯이 내 것임에 매우 감사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자기 계발 병 걸린 환자처럼 무엇이든 했겠으나, 그 날은 아팠으니 쌀죽을 해 먹고 잠을 청했다.



분명 이 날은 내게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더 이상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 어디 가서 ‘나 건강해요’라고 말할 수 없게 된 것. 이제 술을 마시고 다음 날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도 안되고, 무리하게 약속을 잡아서도 안 되는 것. 일주일 중 하루는 육체에게 휴식을 줘야 할 것. 함부로 저녁에 약속을 잡지 않을 것. 내 몸 컨디션을 항상 지켜볼 것. 스트레스 정도를 컨트롤할 것. 이제 덩칫값을 못한다는 걸 그만 인정할 것. 등등 많은 걸 깨달은 날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어떻게 쉬어야 되는지 고민도 했었다. 힘들어하면 사람들은 그냥 쉬라고 한다만, 무작정 집안에서 허공을 바라보거나 유튜브를 보는 것을 '쉰다'라고 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난 이럴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꼭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가는 건 너무 힘들었다! 



무슨 대답을 해줘도 내 몸은 다 싫다고 하는 것은 깐깐한 얘 같지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쉬는 것에도 때에 따라 다른 방법이 있었을 뿐이다. 난 그저 어려서 잘 몰랐던 건 뿐이고. "몸이 힘들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총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할 때. 두 번째로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마지막으로는 육체적으로 힘들 때였다.


 

1.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할 때 


나는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문제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욕심쟁이인 점인가. 아이폰 투두 리스트에는 목록이 항상 빼곡히 가득 차 있고, 모든 항목이 단 한 번도 없어진 적이 없다. 학생 시절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하나 씩 클리어하며 행복감을 얻었으나 최근에는 도저히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도, 공간도, 체력이 없었다. 그러니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고 주말에도 온전히 쉬기는커녕 어영부영 공부하다 어영부영 친구랑 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왜 없을까…?’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회사를 다니고 우리 팀은 새벽까지 일하는 팀은 아니었기에 핑계로는 부적절했다. 결국 내 의지가 부족했다. 진짜로 하고 싶으면 새벽에라도 아니면 밤을 새더라도 해야 하는데… 그냥 게을러서,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자기 계발서 문장으로 범벅이 된 ‘미라클 모닝’을 읽고 아침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이사하여 혼자 살게 되면 더욱더 활용하리라. 좁은 집도 문제였지만 다행히 전세 계약을 했기에 곧 해결되리라 믿는다. 운동도 꾸준히 해야지.



2.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을 때


회사에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 + 전셋집을 구하던 스트레스들이 겹친 시기였다. 이외에도 매번 일어나지 않은 안 좋은 상황을 상상하며 화를 내고,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는 아주 피곤한 습관이 있다. 그만하고 명상이나 해야겠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가지고 그만 쉐도우 복싱하고 명상이나 해야겠다.



3. 육체적으로 힘들 때: 육체가 쉴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체력을 쌓는 것과 육체가 쉬는 것은 다르다. 육체가 쉰다는 건 아무런 긴장감 없이 멍하니 유튜브를 본다던지 등의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매우 비생산적인 시간으로만 바라봤던 이 순간들이 생활에 매우 조금은 남아있어야 했다.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고 쉼 없이 일하는 이 반복 주기에는 육신이 쉬는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아주 가끔씩은 내게 게임하는 시간도 선물해주어야겠다. 마침 모바일 카트라이더를 매우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드는 의문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지 않고 육체적으로 쉬기 위해서는 나에게 현질이 필요할까?



프리랜서 데뷔 후 처음으로 맞이한 방학 같았다. 최고의 부자는 다름 아닌 시간 부자 아니겠는가. 앞으로의 어려움은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넷플릭스와 왓챠 플레이와 책과 만화를 보며 몇 주를 보냈다. 그러한 허송세월 타임 없이는 영혼도 풍부해질 수 없다. -월간 이슬아, 이슬아-



어렸을 때는 쉰다는 게 그저 누워서 티브이만 보는 것인 줄 알았다. 투니버스에서 틀어주는 짱구는 못말려를 보면서 알새우칩 하나 먹는 게 최고의 행복이었는데. 이제는 그때보다 책임질 것이 많아졌기에 더 잘 쉬어야겠다. 내가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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