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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 퍼퓨머 제1권 빛의 물

4. 2부 오래된 이끼(2)

# 비통(鼻通)     

조선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5) 선생은 34세 되던 해에 신기통(神氣通)과 추측록(推測錄)을 합본하여 기측체의(氣測體義)를 펴냈으며 그중 신기통의 한 부분인 비통(鼻通)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아 막힘이 없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첫머리에 ‘코는 기를 통하는 구멍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코가 사람의 근본임을 제시하여 곧 후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으며, 냄새의 비밀을 밝혔던 것이다.     

그는 비통에서 제규제촉(諸竅諸觸) 가운데 가장 빠르고 거짓됨이 없는 것은 오직 코로 냄새 맡는 것이라며 코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함을 말하였다.

이제 이세는 자신의 제규(사람이 외부와 통하는 아홉 구멍)와 제촉(사람의 여러 감각)으로 애눌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자신만의 후각만으로 이 모든 향재를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 군락지인 울진 금강소나무 숲 입구 소광 2리 금강송 펜션 앞에서 이세는 사전에 연락된 방 선생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곳에 도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세에게 누군가 다가서며 말을 건넨다.

"혹시 최의원 님 손주분이 아니신지"

"아! 방선생님"

"의원님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하고 정말 죄송하게 되었네요"

"예 괜찮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셨어. 제대로 연락도 못 드렸네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가 방 선생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그런데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산울음 소리가 나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세는 서서히 어둠의 그림자가 이곳에도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제3구간의 대왕소나무군락지를 그곳 책임자인 방 선생의 도움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 아니 예비되어 있었던 일이었는지 모른다. 둘은 잠깐 차를 세워놓고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방 선생에게 애눌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그는 100년 이상 된 소나무는 많지만 오래된 이끼를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소나무는 대개 양지바르고 건조한 곳에 자라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차로 너삼밭을 따라 36번 국도 광천교에서  금강소나무 군락지에 이르는 곳에 지나니 소광천과 대광천이 흐르고 있다.      

화전민 촌을 지나 30여분을 지나니 소나무군락지가 나온다. 이곳이 금강소나무 군락지이다. 차에 내려 돌아보니 530년이 넘은 최고령 금강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끼를 찾을 수 없다. 계속 따라가니 미인송을 만날 수 있었다. 수령이 350년이 되었다는데 이곳에도 여전히 이끼가 없다. 탐방로를 따라 소나무군락지를 몇 시간째 살펴보고 있지만 이끼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몇몇 소나무에 이끼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소량이며 오래된 것 같지가 않았다.   

  

방 선생은 미안해하였다. 이곳에서만 20년의 세월을 보냈기에 모르는 곳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번만은 쉽지가 않은가 보다. 오래전에 이세의 외조부로부터 큰 신세를 지게 되었던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22년 전 서울에 살 때 정말 살림이 어려웠다고 한다. 하루는 임신 중인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해 울며 거리를 헤매는  그를 할아버지가 발견하고 그의 아내를 치료해 주고 생활비를 대주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이를 순산해서 지금 그 아이가 22살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곳도 외조부의 소개로 20년 전에 정착하여 지금은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방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는 외조부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자 방 선생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한다. 외조부 죽음의 내막을 알리자 방 선생도 충격에 빠졌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결심했다는 듯이 이세를 자신의 차에 태워 외조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꼭 들어 드려야 한다며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없는 길로 차를 몰았다.     

가는 곳곳마다 채워진 자물쇠를 풀고 이동하며 소나무가 보이는 곳이면 차를 세우고 이세와 같이 이끼를 찾아보지만  애눌은 보이질 않았다. 날은 어두워 가고 이끼는 찾을 수 없고 이세는 자신의 무능력에 한탄한다.


갑자기 산 위에서 돌이 구른다. 산사태를 만났다. 좁은 산악도로에서 산사태를 만나면 달리 피할 방도가 없다. 돌이 무더기로 내려온다. 차가 휘청거리며 절벽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큰 바위에 부딪히며 멈추어 섰다. 하지만 타이어가 찢어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방 선생은 이곳까지 견인차가 올 수 없으니 같이 하산하기를 권유하였지만 이세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내려가면 다시는 애눌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방 선생은 빨리 내려가 타이어를 차에 싣고 오겠다고 하며 그곳을 떠났다.  

"이세씨! 날이 어두워지면 산짐승 나타날 수 있으니 어둠이 내리면 차에 들어가 계세요"

"차 안에 물과 먹을 것이 있으니 요기가 될 거예요"

    

이세는 혼자 남게 되고 어둡기 전에 계속해서 소나무를 찾아 돌아다니니 온몸은 상처투성였다. 점차 어두워져 차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길을 잃어 이곳이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스쳐간다. 그리고 산이 소리를 낸다. 방 선생이 말하였던 그 산울음!  온몸이 마비되고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마치 죽음의 소리 같았다. 갑자기 묘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어둠의 냄새, 죽은 자의 냄새, 그리고 역한 분냄새가 이세를 둘러싸고 있었다. 단순히 냄새만이 아니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이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순간 이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후각은 기억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름다운 향기를 꺼내어 맡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악한 냄새는 이세의 기억 속 향기에 밀려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산울음 소리도 멈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새벽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이세는 자신의 후각으로 애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코를 세우고 모든 마음을 오직 공기의 흐름에 집중하여 아주 천천히 냄새를 맡았다. 나무냄새, 풀 냄새, 흙냄새, 바위 냄새, 고사리와 버섯과 잡풀 냄새가 스쳐간다.

이세는 냄새를 모으고 흩으면서 분별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주 가늘고 약하지만 묘한 냄새가 코끝을 건드린다. 간혹 끊기기도 하면서 그 냄새는 이세의 뇌에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세는 애눌의 냄새를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소나무와 송진, 그리고 오래된 이끼의 냄새가 어우러져 나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그는 자신의 후각을 믿고 냄새가 이끄는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길의 끝은 낭떠러지에서 2미터 정도의 아래에 길게 드리우진 소나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무를 향해 미끄러져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무의 아랫부분에 푸른 이끼가 꽤 많이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끼를 조심히 긁어내어 맡아보니 그 향기는 깊은 태고의 냄새처럼 순수하고 깨끗하였다. 이세는 단번에 애눌임을 알았다. 애눌을 채취하고 절벽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 수백 근이 족히 넘는 검은 멧돼지 두 마리가 이세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세는 올라갈 수도 없고 더 이상 버틸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세는 그 순간 외조부가 주신 주머니에 들어 있는 구세향을 꺼내어 공중에 흩뿌렸다. 향긋하면서도 쓴 칡뿌리 냄새를 풍기며 점차 퍼져나갔다. 곧 멧돼지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떠나가고 이세는 일촉즉발의 순간을 넘기며 절벽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멀리서 차 한 대가  다가온다.  방선생이다.

"많이 기다리셨죠. 미안합니다. 타이어 가게가 문을 닫아 아침에야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애눌을 찾았어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차바퀴는 수리되고 이세의 모습을 본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통고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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