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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자유를 존중해 줘 “라는 주장은 개소리다

자유라는 허상에 사로잡힌 노예들


여사친이나 여자 지인들이 추워할 때마다 입고 있던 옷을 빌려주는 남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싫다, 빌려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완곡히 표현해도 그는 나의 요청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 느끼고 거부감을 느꼈다. 자신은 거리낄 것이 없으며 오히려 서로 감정이 없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했다.


오마르의 영상 <남자가 여자에게 벗어주는 외투의 심리학>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인들이 할 법한 행동을 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과의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의 관계를 그려보기에 적합한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다. 실제로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남녀는 성관계를 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주 보고 있는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다 옷은 하나의 상징이다. 옷은 기본적으로 내가 세상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옷을 빌려 입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각별한 사이에서 이뤄진다.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남자는 자신의 소유물로 인해 자신보다 여리고 약한 존재를 ‘지켜주고 있다 ‘고 생각하며 여자는 그 남자로 인해 ‘보호받는다 ‘고 느낀다. 단지 상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옷을 빌려줌으로써 직접적으로 그 여자를 보호하는 데에 기여를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착각과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여러 사람들이 있는 술자리등에서 그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타인에게 위에 열거한 사항들을 전시하는 듯한, 공인받은 듯한 모양이 되므로 상징은 비약적으로 치솟는다. 남자보다 훨씬 섬세하고 예민한 생물인 여자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남자의 옷을 받아서 걸치지 않는다. 술자리 등에서 이성적 감정이 1도 없는, 정말 이성적으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의 옷이 몸에 닿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여자는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남자친구가 어디 가서 여자들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주고 다니는 걸 보면서 좆같지 않은 열받지 않을 여자는 없다. 그 감정을 여자라면 모르지 않는다. 자신의 남자 친구가 어디 가서 여자한테 겉옷 빌려주면 눈이 뒤집힐 거면서,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의 옷을 꾸역꾸역 빌려 입는 여자는 둘 중하나다. 1. 역지사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능이 딸리거나 2. 그 사람의 여자친구가 열받아하고 불안해하는 건 알빠노고, 어디 한 번 해보자는 것.


그러나 누군가를 돕는다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 힘, 강함, 여유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타인을 도우면서 자신의 효능감을 체험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사실 나에게는 없다. 다만 그날, 그의 카디건에 베여 있던, 내가 쓰지 않는, 확연하게 느껴지는 다른 여자의 향수를 맡은 순간, 그의 자유를 존중하는 나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상대를 좋아하면 할수록 나는 더 외로워졌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참 쉽지만, 사랑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좋아한다’는 내 감정에만 취해서 상대가 내게 주었던 수많은 사랑의 증거와 무수한 표현들을 지나쳐 점점 더 높은 기대를 쌓고 무너질까 두려워진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은 슬픔과 실망의 묘한 조합이다.

그 사람을 좋아할수록 나는 자주 슬프고 실망스러웠다.


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말도 안 되는 기대들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에 질투하고, 빈틈없이 상대의 모든 것이 내 것이길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사랑이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서 서로를, 그리고 서로에게서 자신을 독립시키도록 지원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한다면, 나의 애정 어린 감정이 보답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그저, 그저 사랑해 “주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자유를 존중하고 체념하여 ‘서글픈 행복‘을 선택하는 순간에, 나는 더 자라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게 과연 사랑을 지속시키는 데에 더 알맞은 걸까?

.

.

.


아니, 그렇지 않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류시화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했었던 기억이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모든 고통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알람과 같은 역할이다. 그리고 고독이나 외로움도 고통의 일종이다. 인간 뇌는 혐오 신호라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 고통은 혐오 신호의 일종으로 조직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고 신체를 잘 돌봐 생존에 유리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독려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외로움 역시 위협에 대해 경고한다. 다만 외로움은 물리적 위협이 아닌 사회적 위협에 대해 경고한다. 외로움을 느끼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게 된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니, 보호와 소속, 지지와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외로움의 최소 단위는 둘 이상인 것이다.

외로움의 목적은 결국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를 찾거나 어긋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때 느꼈던 외로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너 혼자 고립당할 위험에 처해있으니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개선시켜라! “







소년 만화에는 클리셰처럼 여겨지는 가치들이 있다.


꿈, 우정, 사랑, 모험, 자유!


그런데 그 클리셰 중 하나인 “자유”를 부정하는 전설적인 작품이 있다.

바로 <진격의 거인>.


???

우리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다. 그걸 가로막는 자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상관없어. 흐르는 불이든 얼어붙은 대지든 뭐가 됐든지 간에 그걸 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자유를 손에 넣은 자다.



나는 자유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내 자유의지가 선택한 결과다.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인 자유 무새 에렌이 1화부터 자유를 부르짖는 진격의 거인이 어떻게 자유를 부정한다는 걸까?


자유는 추구해야 마땅한, 소년만화의 절대적 가치가 아닌가?




<12가지 인생의 법칙> 중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혼돈은 지독한 배신을 당했을 때 느끼는 절망과 공포다.
혼돈은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도착하는 곳이다.
혼돈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상황을 의미한다.
혼돈은 형태가 없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혼돈은 곧 자유, 무시무시한 자유이다.


‘무엇’에 대해 알게 되면 동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객관적인 사실에서 ‘의무’와 ‘책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속 로제는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면서도 폴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문에 밤마다 폴을 외롭게 홀로 두며 밤거리를 거닐고 다른 여자를 품에 안는다.


“ 난 자유로운 남자야.”라는 자신의 마지막 말이 그를 좀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라는 뜻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로제의 여성편력 따위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로제가 사랑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자유’가 아니다. 상대를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을 이용하면서까지 누려야만 하는 것이 자유인가?


로제가 사랑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은 그저 자신의 보잘것없는 욕구.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고 자유를 찬양하는 척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이다.


(진격거 결말 스포)

땅울림으로 자유를 손에 넣은 에렌을 보고 아르민은 이야기한다.


“얘기해 줘. 에렌. 도대체 네 모습 어디가 자유로운지.”


진격의 거인 초반 부분, 내용의 주를 이루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 악과 선의 대립으로, 벽을 부수고 거인을 데려온 존재들은 에렌의 고향을 짓밟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죽여 마땅한 악인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에렌은 가축처럼 살아가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자유에 대해 칭송하며, 자유를 향한 의지를 내보이며, 계속해서 자유를 추구하여, 그 자유를 향한 여정에 우리를 동참하게 한다.


인간 vs 거인인 줄 알았던 싸움은

거인 vs 거인의 싸움으로 변하고 마침내

인간 vs 인간의 싸움이 되어버린다.


자유를 원한다면, 상대의 자유를 빼앗아야 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인간성까지 버리고 아군을 사지로 내몰아야만 한다.

나와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과 서로 죽이는 일도 일어난다.


진격의 거인은 1화부터 우리를 자유에 열광시키고는

돌연 그 자유를 해체해 날 것의 추잡한 실체를 들이밀고 우리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


봐라. 이게 그토록 추구했던 자유다.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이 섬에 악마 같은 건 없었어. 나와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었을 뿐이지.”


후반부에서 우리는 벽을 부순 그들의 입장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죽여 마땅한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향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들은 선악 없이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존재였다.


증오의 연쇄를 끊지 못하고 대물림하는 선조들. 분노를 받아줄 대상이 필요해 전쟁의 화살을 오로지 파라디 섬에 돌리는 마레인들. 같은 파라디 섬 내에서도 정치적 대립으로 서로 죽이는 고위층. 지하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필요에 의해서만 손을 내미는 히즈루국등.


작품은 진행하는 내내 우리에게 인간의 추악한 실체를 정면으로 드러내더니 종국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벽 밖 모든 증오의 대상을 절멸시키기 위한 학살까지 목격하게 한다.


그게 우리가 함께 추구하고 응원하며 열광해 왔던, 에렌이 끝내 보고자 했던 광경, ‘자유’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연 자유로웠는가?


돈의 노예라는 말은,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돈에 너무 메여 돈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저당 잡힌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그의 곳간에 얼마가 쌓여있든 간에, 그가 돈에 집착하는 한 그는 여전히 돈의 주인이 아닌 노예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의 노예라는 말은, 자유가 없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에 메여서, 자유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자유에 대한 신념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대의로 학살마저 자행하는, 이미 죽은 사람의 원념에 이끌려 미카사의 선택이 초래할 결과를 보기 위해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여야만 했던 운명의 꼭두각시 에렌, 그의 모습 중 어디를 보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자유의 광경은 이토록 처참한 지평선이었을 뿐이다.

그럼 그 이후엔 진짜 자유가 찾아왔는가?


아니, 파라디섬은 머지않은 미래에 또 증오의 연쇄로 인해 전쟁터가 되어 멸망한다.

자유의 날개를 펼치며 수많은 조사병단이 심장을 바쳐서 얻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고작 이런 게 자유의 진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대가는 무겁다.


작 중, 케니 아커만은 말한다.


내가… 보아왔던 놈들은…, 다 그랬다…
그 대상은 술이나…, 여자..., 신이기도 했지.
일족... 왕... 꿈... 자식... 힘...
다들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거야...
다들... 무언가의 노예였어...
그 녀석조차도...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모두 무언가의 노예다.

자유를 표상했던 에렌이 보여줬던 그 끝의 결말이 이런 거다.

그도 결국은 자유의 노예였다.

이미 죽은 사람, 선조가 저지른 죄, 연쇄적인 증오, 망념, 자유라는 허상에 대한 집착 등, 무수한 것들에 속박당한 노예다.


작가는 이런 말이 하고 싶은 것 같다.


사실, 자유라는 것은 환상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작중 인물, 그리샤 예거는 자유의 상징인 비행선을 보러 나갔다가 여동생을 잃게 되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여동생뿐 아니라 남은 자신의 삶도 잃었다.

쭉 그날의 기억에 속박되어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게 그가 지불한 자유의 대가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비행선 따위 보러 나가는 게 아닌데…”

“비행선을 본 자유의 대가는 너무 컸어…”


시조 유미르는 2000년 동안 사랑의 노예로 살며 스스로 속박하기를 택하여 긴 고통과 영겁의 시간을 보내다, 최종적으로 결국 미련을 버리고 힘과 함께 소멸하는 최후를 맞는다.

그저 거인의 힘과 함께 소멸하는 최후. 고작 그게 자유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작가는 계속해서 자유를 실현해 봤자 그 끝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오히려 더 처참해졌음을 작 중 내내, 섬세한 장치를 통해 전시한다. 막상 자유를 좇아 달려와도 그 끝엔 절망밖에, 아니 절망을 넘더라도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준다.

거인들 중 유일하게 자유롭게 싸울 수 있던 진격의 거인 조차 진짜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진격의 거인들은 에렌이 선택적으로 보여주는 계승자의 기억을 봄으로써

온전한 ‘나‘로서의 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진격의 거인 계승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적 특징, 진화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본능,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주어진 환경에 태어날 때부터 수없이 영향받는 이상 진짜로 ’내‘가 선택한 자유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표방했지만 작가가 진짜 의도했던 것은, 자유라는 환상을 해체하여 매달아 놓고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보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





폴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스스로의 자유에 집착하고 있고 그걸 잃을까 봐 두렵다고 하겠지. 그러니까… 요컨대 나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하기에는 말이야.”

“하지만 로제, 난 당신을 사랑하는걸.” 정말로 놀란 듯 메지가 반박했다.
“아! 그렇지 않아.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마.”라고 소리치며 그는 거북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상대를 자신만큼 소중히 여기는 건 폴과 나의 경우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로제가 연인인 폴과 섹스파트너 메지 사이를 오가며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란 도대체 어떤 형태인가? 그게 정말 자유가 맞긴 한가?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가,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폴에게는 고독을 의미할 뿐”인 그 자유가 정말로 자유로운 것인가?




부모가 ‘안돼’의 뜻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그 아이에게는 ‘합리적 한계’에 대한 개념이 생길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지나친 혼돈은 지나친 질서를 낳게 되기도 한다.


조던 피터슨과 그의 아내는 잠시 동안 이웃의 밥을 잘 안 먹는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아이의 ‘안 먹을 수 있는 자유’, ‘나를 파괴할 권리‘를 존중해 주는 어머니였나 보다.


그러나 피터슨 부부에게는 그건 괜찮지 않은 일이었다. 피터슨과 아내는 어르고 달래며 어떻게든 아이에게 점심을 먹이려고 했다. 밥을 먹으면 요란하게 칭찬해 주고, 거부하면 억지로 밀어 넣었다. 포기하지 않고 어찌어찌 한 숟갈 입에 넣으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고, 착하네”라고 말해주었다. 피터슨의 아내는 밥그릇을 들며 “이것 봐, 안 남기고 다 먹었네”하며 칭찬해 주었다. 그 아이는 귀여웠지만 마음에 상처가 있어 보이는 아이였다. 처음 피터슨의 집으로 왔을 때 그 아이는 구석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피터슨이 장난을 걸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아이가 피터슨 아내의 칭찬에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식탁에 앉아있던 모두를 기쁘게 했다. 그 후로도, 그 아이는 온종일 강아지처럼 아내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내 품에 안겨 애정과 관심을 갈구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 아니었을까?


지크 예거는 아르민과 좌표에서 만났을 때 이렇게 얘기한다.

지크: 생명이 살아남은 이유는
생명이 증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증식하기 위해 생명은 모습과 형태를 바꿔왔고
온갖 환경에 적응해서 오늘날 우리에 이르렀지.
보다 많이, 보다 널리, 보다 풍요롭게.

즉, 살아가는 목적은 증식하는 거야.
이 모래도 돌도 물도 증식하려고 하지 않아.
하지만 생명은 오늘도 증식하려 필사적이지.
죽음이나 멸종은 증식이란 목적에 위배되는 것.
그래서 공포라는 벌칙이 있어.



아르민: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 바깥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이 뭐죠?

지크: 글쎄, 이젠 무리라고 보는데.

아르민: 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지크: 어째서? 아직 증식하기 위해서?
종을 존속시키는 게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공포에 지배당한 생명의 참상이라 할 수 있지.
그야말로 무의미한 생명 활동에서 비롯된 공포말이야.

아르민: 동료들이 싸우고 있어요!
지금이라면 아직 수많은 이들을 공포에서 구해줄 수 있으니까 공포와 싸우고 있다고요!

지크: 왜 지면 안 되지?
살아있다는 건 언젠가는 죽는다는 거잖아?
의외로 죽는 순간에는 안도하게 될지도 몰라.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증식만을 위해 놀아났던 날들이 끝나서
이제 자유로워졌다고…


절망하는 아르민의 시야에 추억 속에 낙엽이 걸린다.


아르민: 석양이 질 무렵, 언덕 위의 나무를 향해 셋이 달리기를 했어요.
말을 꺼낸 에렌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고
미카사는 일부러 엘렌보다 늦게 달렸죠.
전 당연히 꼴찌였고요.
하지만 그날은 바람이 따스해서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어요.
낙엽이 휘날렸죠.
그때, 전 어쩐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여기서 셋이서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닐까 하고요.

비 오는 날, 집에서 책을 읽을 때도,
다람쥐가 내가 준 나무열매를 먹었을 때도,
모두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녔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졌죠.

지크: 그건…


그러자 아르민이 들고 있던 낙엽은 순식간에 지크의 눈엔 추억 속의 야구공으로 보인다.

아르민: 저에게 이건 증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뭣도 아니지만 아주 소중한 거예요.

지크: 아아, 그래.
그냥 던지고 받고 또 던지고.
그걸 되풀이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지.
하지만 맞는 말이야.
난 그냥 계속 캐치볼을 하는 게 좋았던 건데.


자신의 동족, 파라디인들이 죽을 때까지 침략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한 파라디섬 안락사.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던 지크 예거.


그는 “인간의 생존 목적은 번식이다. 인간은 번식하기 위해 살아간다. “며 그 번식과 생존엔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여기던 그는 죽기 전에서야 이 사실을 깨닫는다.


쿠사바 씨. 우리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어.
난 지금도 안락사 계획이 옳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과 캐치볼을 할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나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일단은 고맙다고 할게. 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느꼈던 카사바씨와 다시 캐치볼을 하기 위해서라면 다시 태어나도 좋을 것 같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평생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아버지에게 태어나게 해 주어 감사를 표하는 것, 그러고 보니 오늘의 날씨가 참 좋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들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느끼며 지크는 눈을 감는다.


지크에게 중요했던 것도 파라디인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저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사는 것, 그리고 캐치볼을 하면서 느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감각‘을 한 번이라도 더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


흔히 우리는 사랑한다면 자유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틀렸다!

자유는 허망하다.

아이가 원한다고 사탕을 쥐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한계를 설정하고 그 사람이 진정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현대인에게 이런 걸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은 현재로서는 사랑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연인의 자유를 희생하도록 해야 한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
- 아르민












참고)

<진격의 거인>

<12가지 인생의 법칙> - 조던 피터슨

<우리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 스테파니 카치오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오마르의 삶 - 남자가 여자에게 벗어주는 외투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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