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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을 사랑하게 된 순간

당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https://youtu.be/oFRYZrXefRY?si=0yE5Yt2GklB0fJSr



적당한 정도의 우울감이 나를 살게 하는 것처럼, 적당한 정도의 행복감은 오히려 나를 죽고 싶게 만든다. 별 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 매일매일이 아주 만족스러운 요즘,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것도 죽음이다. 난생처음 듣는 증상. 하루종일 방향 감각을 상실할 만큼 어지럽고, 구토감이 올라오고, 코피를 쏟는 다면 그건 뇌질환의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의 생명은 촌각을 다투는 선택의 기로에서 힘없이 매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없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다만 그가 없이는 별로 살고 싶지가 않을 것 같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의미와 행복에 대한 초점을 전혀 다른 곳으로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한동안 흐릿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억지로 포커스를 옮겨 담더라도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을까? 아니면, 끝까지 담지 못했던 풍경이 아른거리면서 못내 아쉬워할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죽게 해달라고 장난처럼 말해 왔다. 내가 먼저 죽고, 그다음에 죽어달라고. 그런데 그가 먼저 죽을 수도 있을 거라고는 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불안했다. 내 바람대로 되지 않고 그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그럼에도 또 다른 사랑을 하면서 나아가려고 할까? 그가 없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


태어난 이래로 가장 행복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바라만 봐도 좋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은, 내가 스스로에게도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스스로조차 기대가 안되니까 바라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있을 시간이 많이 주어졌고, 그 덕에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만큼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존중도 많이 받았으며,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근원적 공포와 직면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무한한 신뢰로 무엇이든 자주적으로 해왔던 나는 독립적인 게 좋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그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실망할 바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게 낫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홀로 남겨지고 버려지는 것. 결국 그게 나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때문에 버려질 것 같을 때마다 스스로 놓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것 일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엔 나에게 참 많이 기대도 하고 스스로에게 분하고 억울해서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내가 나를 비참하게 몰아세웠던 이유는 단 하나, 나를 더 사랑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대하는, 내가 만족할 만한 내가 되기 위해서이다.

지금 스스로에게 큰 기대가 없는 건 내가 그만큼 안정되어서,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애써 내 삶을 구제하지 않아도 살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건 오히려 예전보다 절실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지쳐있지만 과연 그동안 내가 걷던 길이 오르막길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어디로 오르기 위해, 왜, 숨이 차기 시작할까.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나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충분히 노력했을까?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스스로를 볼 면목이 없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면에 종종 주변인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가장 어렵다. 나는 언젠가 내가 나를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결국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그리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끊어낼까 두렵다. 평소에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고 있지만, 가끔 내 안에 아주 막강한 심판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심판자는 나를 거쳐간 누군가의 모습들이 내재화된 것이겠지. 이 막강한 시선 외에 다른 그 어떤 시선도 신경 쓰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당당한 사람처럼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목소리들은 내 안에 남아 더욱더 그 세력을 키워간다.

때때로 밀려들어오는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목소리는 무시무시한 좌절감과 무기력감 속으로 나를 이끌지만 그것도 죽음 앞에서는 아주 호화로운 처사이기 때문에 나는 종종 아무런 저항 없이 목소리를 따라 들어가곤 했다. 목소리가 제시하는 "해내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놓지 못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사실은 해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해낼 수 없다면 어쩌면 나는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하는 불안감.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느끼는 수치심과 두려움, 절망감. 있는 그대로의 내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 못하게 하는 뼛속 깊이 새겨진 타인에 대한 의심과 불신. 그리고 그걸 직면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차라리 거기서부터 도망쳐 해야 할 일들 속에 나를 파묻는 것이다.


스스로에게도 진실하지 않은 대가로 주어지는 형벌은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진짜 '나'를 향한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 번도 진정한 자신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는 사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이 공허함 안엔 무얼 밀어 넣어도 소용없는 게 아닐까?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저 사람들은 대체 나에게 여기서 무얼 받아들이라고 하는 걸까?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려면 내 안에 사랑이 흘러들어 가도록 수로를 연결해야 한다. 그러나 여긴 연결이 끊어져 있어서 사랑이 흘러들어 갈 수 없다. 끊어져 있는 저 너머로 건너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를 잃었다.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것으로 만든 대체품으로, 타인의 주의를 먹이로 주면서 키우는, 흉내만 내는 가짜다. '이게 나예요, 이걸 원했잖아, 그렇죠?' 대체품이 소리친다. 그는 항상 진정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목소리가 큰 것이다. 그와 나를 동일시하면 할수록 끊어진 골은 점점 넓어진다. 스스로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 가는 나의 정체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말하고 드러내면 버림받는다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내게 따뜻함과 기쁨을 선물해 주었던 저 품도 끝까지 나를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최악의 결말을 보지 않을 순 있었지만 이렇게 점점 무뎌져간다면 최악의 결말이 온다 해도 결국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일까? 슬픔을 인식조차 못하게 되는 것. 그렇다면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미련이나 애착에 망가지는 와중에 작은 기대를 또 가지게 되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증거이다. 그럼 나는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한다'말할 수 있을 만큼,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놓고 싶지 않은 애착이 사라진 걸까. 내가 이토록 편안한 것은 애정도 애증도 없기 때문일까.


나의 최고결정기관, 중앙통제시설에서 나를 방치한 탓에 몸 곳곳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안일한 상층부는 종종 자세한 내막을 무시하고 괜찮다고 생각하곤 한다.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실무자의 의견을 따르는 게 옳을 지도 모른다. 연결이 끊어져 있는 탓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지 않은가.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몸이 아파야만 그제야 나에게 몸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곤 한다. 통증을 느끼는 것은 살고자 하는 나를 느끼는 것과 같다. 나의 몸이 나를 더 사랑해 주었기에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 나를 살리고자 한다. 몸은 아직 이 삶에 미련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선택하고, 또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해서 살아진 이 삶을.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이 삶을. 결국 내가 계속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또 한 번 이 삶을 살아가는 일일 뿐이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더,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삶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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