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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진우 Aug 29. 2022

21. 월 280시간 근무자의 비애

다섯 번째 회사 : 광고회사 E사(1)

 결론부터 말하겠다. 근무 환경이 혹독하다는 E사의 소문은 정확했다. 아니, 소문 그 이상이었다.


나는 어째서 E사에 대한 소문이 광고 업계에서만 떠도는지가 궁금했다. 이 정도면 모든 업계의 직장인이, 더 나아가 대한민국 전 국민이 알아야 할 정도였다. 뉴스에도 나오고 기사에도 실리고 그래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어떻게 모르지? 내가 이 의구심을 E사 동료 ‘진’에게 토로하자, 그는 E사가 작은 회사이므로 그 악명이 더 퍼질 수도 없다는 다소 우습고도 슬픈 진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E사에 출근한 지 이틀이 된 날부터 자정 가까이 야근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B사 인턴 생활로 이미 한번 단련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야근을 했으며 심지어 주말에도 빈번하게 출근했다.


밤을 새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회사 회의실에서 새우잠을 자본 경험이 있는가? 나는 원래 없었는데, E사에 입사한 이후 그 진귀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 본래 잠자는 행위에 안락함을 느껴야 하는데 나는 자꾸 처량함을 느꼈다. 그보다 더 처량한 건 눈치가 보여서 회의실 책상 위에서 자는 경우보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자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침까지 질질 흘리며 수마에 빠져 있다가 옆 칸의 볼일 보는 소리에 퍼뜩 깨곤 했다.


물론! 당연히! (이게 당연한 일이 되면 안되지만....) 같은 광고대행사인 B사에서도 철야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횟수는 아주 적었고 만약 철야를 하게 되더라도 회사에서 잠을 자지는 않았다. 일이 다 끝난 이른 아침, B사가 내 귀가를 황송하게도 허락해줬기 때문이었다. 20시간 정도 일한 나는 내 방을 돌아가 내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날은 B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됐다. 이미 이틀 치 노동량을 하루에 다 했으므로.


하지만 E사는 내가 밤을 새우든 말든 순순히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새벽에 회의실에서 잠깐 자게 하고는 몇 시간 뒤에 나를 깨워 다시 일을 시켰다. 혹은 아침에 집에 보내줄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오후에 다시 출근하기를 요구했고 심지어 저녁까지 또 야근을 시키곤 했다. 언제는 이틀 연속으로 철야를 했다. 믿기는가? 지금 이 내용을 쓰고 있는 나도 믿기지 않는다!


 E사는 차원이 다른 회사였다. 일이 많다고 우는 소리를 하며 다녔던 B사도, C사도 E사만큼은 아니었다.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B사와 C사가 그냥 커피라면 E사는 티오피... 아니다. 티오피한테 실례되는 발언이었다. 정정하겠다. B사와 C사가 그냥 커피라면 E사는 사약을 탄 블랙커피였다. 그야말로 E사는 그림에 그린 듯한, 블랙 기업이었다.


 입사 전 기대했던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건 그저 허울 좋은 노동법이었다. E사의 임원진 그 누구도 지키지 않았고 지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언론에서는 주 52시간을 지키는 대기업의 훌륭한 모습과 주 52시간 때문에 돈을 더 벌지 못하는 노동자의 애환을 주로 취재했다. 나같이 평균 주 70시간 일하면서도 돈을 더 벌지도 못하는, 비애에 찬 직장인을 별로 조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울분 터질 일이었다.


 내가 처한 꼴을 아래에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주 70시간 근무 = 주 52시간 근무제의 오용
 추가 수당 없는 임금 = 포괄임금제의 남용


이렇게 E사는 두 제도를 심히 개성적으로 해석해 함부로 활용했다. 그 덕분에 나는 아주 괴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D사를 퇴사하면서 가졌던 다짐은 입사하자마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내 전체 규칙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 나 개인의 다짐은 그리 대단치 못한 까닭이었다.


 E사 같은 회사가 대한민국에 또 있지 않을까?, 거기 직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와는 다르게 살까? 등이 궁금했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 검색창에 관련 키워드를 넣어 집요하게 기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이 기사를 읽게 되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자면, 2015년, 일본 유명 광고회사의 덴츠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신입사원이 과로사한 사건이다. 입사 이후, 월 130시간 잔업, 월 99시간의 잔업을 계속하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츠리씨’ 씨는 이대로면 죽는 게 더 편하다는 말을 남기고 크리스마스 날 자살했다. 그 일로 인해 덴츠는 한동안 몸살을 앓게 됐다고 한다. 덴츠 수뇌부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럼에도 일본 국민은 분노했고, 마침내 일본 노동법은 바뀌었다.


옆 나라의 일인 데다가 시간이 꽤 지난 일인데도, 나는 그 기사를 읽은 뒤 종종 덴츠 신입사원을 떠올렸다. 유족이 공개한 그녀의 사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울렁였다. 증명사진 속 그녀는 무척이나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깊이 공감할 정도로 내 과로가 그녀만큼이냐고 혹여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아니긴 했지만, 곧 그리될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다. 내 최장 근무 시간이 월 280시간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14시간을 일한 셈이었다. (워킹데이 기준으로) 매일 자정에 퇴근한 것과 다름 없었다.


사실 280시간보다 더 일했을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출퇴근 기록을 성실히 남기지 않았기에 나도 내가 얼마나 추가 근무를 한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차피 오늘도 야근, 내일도 야근, 모레도 야근인데 뭣 하러 성실히 출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버튼을 누른단 말인가.


예전에는 총 근무 시간에서 1시간이라도 누락되면 즉각 인사팀에 연락해 수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E사를 몇 개월 다녀보니 깨달았다. 그렇게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꼼꼼히 기록한다고 해서 그만큼 야근 수당이 더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보상 휴가가 더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덧 나는 1시간이 아니라 26시간이 누락되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E사의 직원이 되고 말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면서 26시간이 누락된 건 또 어떻게 알았느냐고?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연락을 받아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날, 그 황당한 대화를 아주 잘 기억한다. 일을 한창 하고 있을 때 E사 재무팀 직원에게 메시지가 왔었다.


 [경비 처리하려고 진우씨 근무 일지 보다가 연락드립니다. 6일과 7일 날 회사 결근했던데, 그때 무슨 일 있었나요?]


 절로 “그럴 리가.”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하루 치 휴가도 쓴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내 출퇴근 기록이 살펴보았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당시 나는 6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7일 오전 11시에 퇴근했다. 세상 어떤 인간이 24시간 넘게 연속으로 근무할 리가 있겠느냐며, 멋대로 판단한 회사 시스템이 6일과 7일 근무 시간을 멋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자동으로 결근 처리된 모양이었다. 실상 그 이틀간 26시간 꼬박 일했는데 말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친하게 지내고 있는 E사 동료들인 ‘진’과 ‘강’에게 전했다. 그러자 연민으로 가득 찬 위로가 되돌아왔다.


 “힘내요... E사는 미쳤어요.”

 “제발 도망치세요.... 빨리 도망쳐.”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사실 나와 별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밤을 새우고 있으면 그들도 밤을 새우고 있었으며 내가 화장실에서 졸고 있으면 그들도 어디에선가 졸고 있었다. 새벽에 간혹 회사 복도에서 진과 강을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아련하게 쳐다봤다.


 ‘지금이 몇 시인데 왜 집에 안 가고 회사에 있으신가요.... 어서 퇴근하길 바라요....’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그 속마음이 전해졌다. E사의 직원인 이상, 우리 모두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낙관을 가져보았다. 이번 제안만 잘 넘기면 될 거야, 이번 피드백만 잘 고치면 될 거야, 하다못해 광고 촬영을 마치면 정말로 여유로워질 거야, 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팀 프로젝트가 하나둘씩 마무리 지어지고 있었다. 이제 끝없이 몰아치는 업무와 야근 러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빛 자수가 새겨진 양말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자유야!”


 광고 촬영까지 끝낸 그 다음 날, 나는 회사 건물 테라스에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쭉 뻗었다. 상쾌했다. 이제 좀 숨통 트며 살 수 있었다. E사 동료들에게 휴가를 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루 정도는 연차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놀러 갈 거냐는 물음에 나는 그냥 집에서 온종일 뒹굴거릴 거라고 답했다.


 그 희망찬 바람이 이뤄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 안 지나서 나의 원대한 휴가 계획은 허무하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바로 투입된 까닭이었다. 이번에는 경쟁 PT 건이었다. 결국, 나는 전과 다를 바 없는 회사 생활을 보내게 됐다. 또다시 야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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