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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 May 05. 2020

치료하기-여행

두 번의 여행

병원에 다닌 지 두 달쯤 되었다.

낮에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자기 전엔 안정제를 먹는다. 안정제는 심박을 느슨하게 만들고 이부자리 위로 성인 남성을 가볍게 눕혔다. 아 그리고 꿈을 꾸지 않도록 하는 약은 수면 중 악몽으로 인한 기상을 막아 한번 자고 일어나면 10시간은 예사다.


그렇게 지내던 중 가족여행 이야기가 오갔다.

결혼을 한 큰누나네가 주도한 가족여행은 동남아 몇 국가 이야기가 오고 간 뒤 베트남 다낭으로 결정했다. 물론 난 어디든 좋다는 의사 정도만 내비칠 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쉰이 넘어버린 어머니의 첫 해외여행이다. 다들 들뜬 맘에 이것저것 준비하기 바쁘다. 나 역시 여행이 주는 들뜨는 맘을 싸구려 선글라스를 사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의 같이 작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하던 형이 그만두었다. 나도 병원을 다니며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려워 두어 달 전에 그만둔 터였다. 형의 제안으로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본의 소도시, 가고시마로. 가족여행 이후 삼 일 후 출국이었다. 갑작스러운 여행 이야기만 마냥 좋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았다. 약을 먹어서 감정을 컨트롤하는 삶이 이런 걸까.




다낭으로 출국한다. 이코노미석이지만 국적기의 친절함은 저기항공에 비길 수 없다. 숙소는 고급 풀빌라인 덕분에 2층 건물이 에어컨이 항상 돌아가고 있으며 가족 풀장이 따로 있어 24시간 수영도 가능했다.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귀빈이다. 영어 한마디 못해도 그들이 한국말로 응대를 하고, 물가가 저렴한 탓에 테이블 위로 음식을 가득 채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들 즐겁게 물놀이를 즐기고, 음식을 먹고 여유로웠다. 나 역시 마찬가지. 다만 잠들기 전에 먹어야 하는 안정제는 놓을 수가 없었고 종종 낮에 찾아오는 호흡 불량과 같은 일을 위해 주머니엔 늘 비상용 안정제가 들어있어야 했다.


돌아오는 귀국길. 인원수가 많은 탓에 가족들은 두줄로 나눠 앉았다. 나는 앞줄 오른쪽 끝.

비행기가 일정 고도로 날아오르자. 다들 편한 자세로 잠을 청한다. 그 모습을 돌아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오른다. 지금은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마냥 눈물이 솟았다. 주체하기 힘들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애써 가려본다. 그렇게 한 삼사십 분을 울었나 보다. 가족들은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얼추 알아챈 듯했지만 굳이 연유를 묻진 않았다. 뭔가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우울하면 나만 힘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도 간만에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친한 형 J는 나와 많이 닮았다. J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여러 번 같이 병원에 갈 것을 권했지만 그의 맘 속 벽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기에 완강히 거절하는 그를 이해했다. J와의 여행은 죽이 척척 맞았다. 둘 다 흡연자에 애주가라 낮부터 맥주를 마시거나 걷다가 종종 흡연을 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가고시마로 가는 비행은 제주를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저가항공 특유에 물 한잔 주지 않는 서비스에도 상관이 없었다. 둘이서 소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며 특히 라멘에 심취한 미식을 누렸다. 이부스키의 해안을 바라보는 노천탕에 몇 해 후에 꼭 다시 이 곳에 오자는 다짐을 한다. 나랑 비슷한 누군가와 여행을 하는 것은 꽤나 즐거운 것이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열흘 안에 두 번의 해외여행은 꽤나 강한 즐거움이며 내 상태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를 뿜었다.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과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도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까지. 모든 사람의 우울을 여행으로 달랠 순 없겠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금 벗어나는 데는 여행만 한 일도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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