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예행연습
정기적으로 검진받아야 하는 질병이 몇 가지 있다 보니 조금 잊을만하면 각기 다른 병원에 들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혈압과 당뇨야 특별한 이벤트가 없으면 그대로 변동 없이 가는 것이지만, 사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기도 번거로운 게 병에 대한 이력을 주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야모야병으로 내내 대형병원으로 다닌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고 안과도 거의 그 정도의 병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들른 안과에서는 진료 전에 반드시 기본 검사를 먼저 시행하고 나서 진료를 봅니다. 시력, 안압은 물론 망막 검사도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검사를 맡은 직원이 열정이 넘치는 직원으로 배정되었습니다. 목소리도 또랑또랑할 뿐 아니라 전달력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안내받을 때마다 살짝 당황스럽기 시작했습니다. 시종일관 반말투였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손녀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곰살맞게 말 붙이는 그런 말투 말입니다.
그냥 솔직한 내 느낌을 한 번 풀어볼까요?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누구 하나 그런 말투로 말을 걸어온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은 곧 슬하에 딸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저에게 애교스럽게 말하거나 싹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종종 나에게 그런 말투로 말 걸어주는 아내가 유일합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애교 넘치고 살살 녹는 말이라도 한다면 약간의 allergy가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의 말투는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나에게 많은 감정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뭐랄까요? 나를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고 말을 거는 거 같아 처음에는 상당히 언짢았습니다. 왜지? 내가? 그러다가 이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직원의 태도에는 가식이 없었고 해맑았기 때문입니다. 아! 저 사람은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는 거구나! 나를 대할 때 벽을 하나 두고 대하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나도 이런 분위기에 슬슬 적응할 때가 왔다는 데에 공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든 나의 육체적 나이는 이미 노년을 향해 갈 것입니다. 내가 생각으로, 마음으로 아무리 푸르게 살아간다고 자신한들 나는 이미 청춘에서 이미 멀어진 나이일 뿐입니다. 다행인 것은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지 조금이나마 읽을 줄 아는 나이에 다다랐다는 사실입니다. 심안(心眼)이 생기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너무 앞서가는 것일까요?
내 나이 17인가 18쯤 되었을 어느 날, 일 보시고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셨던 아버지의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봤자 40 중반을 넘기셨으니 한참 왕성하신 연세이건만 당시 안내양이라는 젊은 아가씨가 그러더랍니다. “할아버지, 뭐 불편한 것 없으세요?” 머리도 검으시고 주름도 별로 없으셨던 아버지는 그 할아버지란 호칭 하나 때문에, 며칠을 두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할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다행히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느끼셨을 그 감정이 제게도 생겼었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돌아왔습니다. 대신 요즘은 내가 내 입으로 먼저 뱉어버리고 맙니다. 그게 차라리 충격이 덜 합니다. 내가 스스로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들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내 마음은 늘 푸릅니다. 그리 살다가 보면 혹시라도 알겠습니까? 내 마음 푸르른 채로 그대로 멈추어줄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