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을까요?
국민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에 담임선생님께서 같은 반 여학생을 위해 환송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이유는 그 아이가 내일 이민을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인근 나라가 아닌 미국 위의 캐나다라 하였습니다. 동기 여학생 중에는 아쉬움에 우는 아이도 있었고 잘 가라는 인사도 서로 나누었는데 정작 본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내내 웃는 얼굴을 유지하다가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는 이민이 좋은 것인가 보다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는 1970년대 초반이니 이민은 둘째치고 해외여행조차 꿈꾸지 못한 시절인 데다 사업하느라 외국물 좀 먹어 본 사람은 주변의 부러움을 받느라 바빴습니다. 자연스럽게 외항선을 타던 마도로스, 비행기를 타던 비행사나 승무원들은 지원 자체가 워낙 까다로운 시절을 살았습니다. 여권은 대부분 단수여권이었으며 복수여권으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생각하게 된 건 제 기억으로 1989년 경이었을 것입니다.
제주도 가는 것조차도 사실 비행기보다는 배를 먼저 떠 올렸습니다. 가격에서도 선박이 훨씬 저렴했습니다. 신혼여행이나 되어야 가보던 제주도였습니다. 저부터도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처음 가보았고 비행기도 그날 처음 타보았습니다. 그런 시절이 이제는 그냥 추억입니다.
이제는 해외여행은 물론 이민 절차도 한결 수월한 시절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역(逆)으로 풀이하자면 우리나라의 하늘 문이나 바다 문도 예전에 비해 넓게 열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주변을 둘러보면 여기저기 외국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거리에서 외국인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친구들과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었는데 요즘은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기억일 뿐입니다.
아이일 적 이민을 했던 그 친구는 어찌 사는지, 캐나다에 계속 사는지 아무런 소식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친구들의 아쉬움과 부러움을 뒤로하고 향했던 캐나다가 기회의 땅이었을까요, 아니면 모진 땅이었을까요?
세계가 하나 되고 교류가 많아졌다고들 하는데, 섬이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해외로 향한다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선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발 하나를 내디디면 이웃 나라인 사람들은 상대를 바라볼 때 어떤 느낌으로 바라볼까요? 그런 면에서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이 부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지리학적 혜택이야 하늘이 주시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큰 어려움 없이 교류하고 나누는 사람들은 어쩌면 큰 복입니다.
저도 이 나이에 한 번씩은 나가보고 싶은 나라나 지역의 목록을 짜보곤 합니다. 못가 본 나라가 아직도 많으니 그 목록이야 거의 변동은 없지만 기도로나마 길을 열어주십사, 기회를 주십사 간구하는 일도 빼놓질 않습니다. 때로는 실망도 하고 낙담도 하지만 부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자녀는 물론 많은 후대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 좋겠다. 남들도 우리를 보며 감탄도 하고, 많은 도전도 받으면 좋겠다. 기도하는 중입니다. 지도로 보는 세상은 좁디좁지만 내가 품을 세상은 의외로 넓디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