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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곤 Feb 02. 2024

리포트 용지

무슨 내용으로 채울까요?


대학에 다닐 때, 특히 예과 시절에는 리포트라 하던 과제 제출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교양과목에 특히 많았고 정해진 규격의 리포트 용지 몇 장 분량이라고 구체적으로 정해주곤 했습니다. 교내의 학생회관 같은 곳에서는 학교 이름이 새겨진 공식 리포트 용지를 B5 크기로 팔기도 했고 시내 문방구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말이 리포트 용지이지, 특별할 게 없는 것이 종이에 일정 간격으로 줄만 쳐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요 간혹 표지 역할을 하는 용지를 덤으로 주는 정도일 뿐입니다.     

이번에 산 리포트 용지입니다.


이 리포트의 고민은 당시 참고할 만한 책이나 정보를 찾는 일이 크나큰 일이었을 뿐 아니라 실제 더 큰 고민을 꼽으라면 어떻게든지 글씨를 잘 써서 좀 더 좋은 인상을 남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글씨가 좋은 친구들이야 큰 고민은 아니었을 테지만 거의 악필 정도면 그 압박감은 실로 상상 이상입니다. 궁여지책으로 글씨를 잘 쓰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이라도 사주며 대필을 부탁하는 일도 생깁니다만 요즘이야 어디 상상이나 할 일인가요?     


그러다 보니 악필을 교정해 준다는 학원이나 관련 광고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악필의 문제는 비단 학교에서의 문제를 넘어 직장 내에서도 하나의 큰 이슈로 등장합니다. 보고서를 포함한 서류 작업은 물론이요 중요한 자리에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려면 글씨 하나만으로 결과가 달라지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근래의 전산 도구들이 얼마나 간편하고 고마운 도구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인턴으로 처음 임상으로 나오던 시절도 참 추억이 많은 시기입니다. 당시만 해도 모든 처방과 진료 기록들이 모두 수기(手記)로만 이루어졌습니다. 일과 중에는 물론이고 일과 후에도 처방을 내며 자료를 입력하는 일은 인턴의 중요한 업무에 속했습니다. 할 일은 산더미이고 몸은 천근만근인데 진도는 더디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글씨가 악필인 친구들은 그 고충이 더했습니다. 처방전을 받은 부서는 물론이거니와 병동에서 오더를 보는 간호사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가 없던 것이지요.     


처방과 경과 기록 등의 모든 진료 입력 과정이 전산화되면서 확실히 눈에 띄게 수월해졌습니다. 코드나 자료 찾기도 수월하고 클릭으로 입력되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Typing만 할 줄 알면 진료 기록도 입력됩니다. 물론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마저도 힘들다고 하겠지만 글씨를 배우려는 정성만 있다면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는 문득 그때의 감성이 돋아 뜬금없이 리포트 용지 두 권을 샀습니다. 굳이 그때와 다른 점을 찾으라면 크기가 A4 정도로 커졌으며 종이의 질감이 더 좋아졌다는 정도일 뿐 감성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써 내려갈까요? 재질이 고급화된 그만큼 내 글이나 글씨, 그리고 생각들도 고급화되었을까요? 그것도 내게는 크나 큰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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