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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곤 Jul 10. 2024

나는 라도(羅道) 것입니다.

하지만 편협함은 없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이미지출처:우서놀이터) 이렇게 보면 예쁘지만...



저는 자발적으로 내 고향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말하지 못할 콤플렉스가 있나 싶으시겠지만 굳이 그렇게 추측하셔도 반박을 하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악플을 즐겨하는 그 끝에는 늘 “라도 것들이 늘 그렇지!”라는 댓글이 종종 달리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전라도를 동서남북으로 나눈다면 서북(西北) 쪽에 자리한 익산(益山)이 제 고향입니다. 옛날에는 이리(裡里)라 불렸던 그곳이 고향을 떠나고 몇 해 되지 않아 익산으로 행정 통합이 되었습니다. 고향에 살 때에는 몰랐지만 과연 전라도 사람들이 통째로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악독하고 얄미운 사람들인가? 악한 무리인가? 싶어 속상하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조금은 전투적이어야 험한 세태에 대한 도전이라도 해보겠지만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움츠러들고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더 나아가 오다가다 호남향우회(湖南鄕友會)라는 간판이라도 보면 오만가지 상념이 뇌리를 스칩니다. 뭐 그리 향우회까지? 그런 생각이 가장 많이 들고, 한편으로는 그래! 낯선 타지에서 오죽하면 저리 뭉치겠나 싶어 마음이 짠합니다. 이렇게 어쭙잖은 지역감정은 나라가 크고 작음에 그다지 구애받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이는 유명한 나라의 골칫거리임을 왕왕 보게 됩니다.     


때때로 나는 전라도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자부심으로 여기며 지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북쪽 끝에서 남쪽 끝, 더 나아가 동쪽 끝을 훑다 보면 서로 동족 의식을 느끼면 모를까, 전라(全羅)라는 두 글자만 듣고 마치 전라(全裸)의 몸을 본 듯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우리대로 약간의 늘어진 충청도 사투리와 비슷하고 광양이나 구례 정도에 가면 묘하게 경상도 사투리와 섞인 억양이 묻어나도, 나도 누가 뭐라 혀도 곧 죽어도 전라도랑께! 큰소리칠 줄 아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 든 세대일 것입니다.
 
 
 이 극단의 사실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싶다가도 원래대로 돌려놓기란 어지간히 어렵다는 비관이 들어 힘이 쭉 빠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이야 범위가 좁으니 어떻게든 좋은 방안을 간구해 보겠지만 이 집단적인 광기는 고쳐진다고 해도 여러 세대를 지내야 할 판입니다. 남북한의 반목처럼 서로 뿔난 도깨비 취급만 하지 않아도 다행한 일입니다.     


어지간히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이라면 공감할 테지만 내 출신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입니까? 그건 절대 아니지요. 극히 개인적인 실수나 과오로 그 고향이나 지역까지 소급하여 욕먹을 일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되어야 맞는 이치일 텐데 그건 이상하리만치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의 편협함, 선입견이 문제일 뿐입니다.
 
 언젠가 패키지로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행과 어느 정도 대화가 될 무렵, 동행한 분의 말투가 왠지 익숙하고 친근했습니다. 염치없이 고향을 여쭈니 몇 초를 고민하다가 대답한 곳은 다름 아닌 제 고향이었습니다. 게다가 졸업하신 학교 중 하나는 제가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지요. 그제야 다른 분도 고향 이야기를 하고 또 한 분의 동향인도 우리 이야기에 동참했습니다. 그 대화에는 여타 감정이 개입될 틈도 없이 반갑고 신기함 만이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냥 그러면 될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한 번만 생각한다면 출신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 46절의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우리는 나사렛을 봅니까? 아니면 예수를 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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