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부터라고 특정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학교 다닐 적 종이학 접기가 들불처럼 유행한 때가 있었습니다. 종이학을 천 번을 접어 선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하나의 신앙처럼 굳어져 학생, 특히 여학생들 사이에서 하나의 우상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급기야는 종이학 접기용으로 색종이가 따로 이름 붙여 나오기도 했고 그것을 담는 유리병이 따로 판매되기도 했으며 아이들의 책상에는 종이학 몇 마리 정도는 늘 놓여있다고도 했습니다.
폭풍처럼 밀려든 유행 뒤에는 거의 일본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이 종이학의 유래 또한 일본이랍니다. 사사키 사다코 (佐佐木禎子. 1943-1955)라는 아이가 두 살 되던 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그 원폭에 피폭되는 바람에 10년 후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됩니다. 센바즈루(千羽鶴)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자기가 먹던 약의 봉지를 접어 학을 완성해 나갔지만 664마리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동급생들이 남은 336마리를 마저 접어 천 개를 채우고 사다코의 무덤에 함께 묻었다는 내용입니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종이학의 유래는 이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전영록 씨가 ‘종이학’이라는 노래도 발표해, 인기를 얻은 적도 있습니다. 사실 종이학 천 마리를 접는다고 해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나 확증은 없습니다. 설령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천 마리 종이학의 영험함 때문이라고 믿는 이도 별로 없지요. 그럼에도 종이학이 파도처럼 번진 그 저변에는 간절함, 안타까움, 낭만 등이 깔려있음은 분명합니다.
저는 아마 고등학교 3학년과 대학 예과 때쯤에 걸쳐 이 광풍을 접했습니다. 집에서는 여동생들이,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는 타과(他科) 동기 여학생들의 열풍을 보아 왔습니다. 동생이나 동기 여학생들은 제게도 방법을 가르쳐 주며 열화와 같은 풍조에 동참하기를 꼬드겼습니다. 하지만 손재주도 그다지 좋지 못한 데다 몇 마리만 접다 보면 지겹기도 하고 어깨가 빠질 거 같았으며 눈도 아파 와 그만두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내 맘속에 이게 무슨 짓인지 싶었고 도저히 난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자연스레 소원성취는 무슨!이라는 심보가 밀려들었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해서 종이학 접는 일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어차피 개인의 취향 문제이고 유행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처럼 그다지 관심도 없고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에게까지 동참을 강요하는 일은 아니라는 게 제 오래된 생각입니다. 하긴 종이 접기가 아이들의 정서발달이나 지능에 좋다는 학계 발표가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조물조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뇌를 자극한다고 하지요. 제 어릴 때만 해도 신문지나 달력 종이로 무언가를 만들어 놀았습니다. 남자아이야 딱지가 가장 흔한 놀잇감이었고 여자아이들은 서투르게나마 종이 인형으로 하나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방구에서 딱지나 인형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하고 아이들 손으로 무얼 만드는 일은 현격히 줄었습니다. 아마도 종이학은 그 놀잇감의 대체품이 아닐까? 혼자 추측하는 중입니다.
우리 삶에서 흔하디 흔한 놀이의 종류들이 이제 우리의 뇌리에만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무엇으로 재미를 느끼며 지낼까요? 물론 놀이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겠지만 우리처럼 같이 놀고 같이 웃다가 삐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화해하는 법도 배우는 일은 아예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종이학도 혼자 노는 일에 익숙한 도구였군요. 그냥 정서적으로 교감은 가능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