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와중에 기억나는 병우유
초등학교 다닐 적 학교에서 먹던 우유는 투명한 유리병에 든 우유였습니다. 종이 뚜껑을 손톱으로 누르면 밀리며 열어지던 방식이었는데 조그만 손으로 하다 보니 단번에 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맛은 고소하기가 아주 그만이어서 바닥이 하늘을 바라볼 때까지 마시고도 입맛을 다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제 사정이 썩 좋지 못한 나라 형편 때문에, 돈을 내야 먹을 수 있던 그 맛난 우유를 많은 친구가 먹지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유가 점점 소비가 늘어나던 시기는 얼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던 70년대 후반 정도였을 것입니다. 대략 제가 중, 고교를 다닌 시절부터는 우유는 물론 요구르트가 나오고 치즈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같은 호황은 물론 아니지만, 80년대 태어난 세대들은 우리 세대에 비하면 확실히 유제품(乳製品)과 친숙합니다.
어릴 땐 잘 몰랐는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내가 우유나 여타 유제품을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습니다. 자주 먹을 수 없던 시절이기도 했거니와 반드시 유제품을 먹거나 마셔야 한다는 절박감도 없어서 적응이 필요한 어린 시절을 그냥 넘긴 탓도 있을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그냥 내 속이 허락하는 정도에서 조절하여 먹으면 괜찮습니다.
유목민족과 달리 우리 민족은, 확연하게 유당분해효소(Lactase)가 부족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우유를 자주 먹게 되면 효소의 생성이 좋아질 테지만 저처럼 성인이 된 후에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정도가 심하진 않지만, 마시고 싶은데 아니면 마셔야 하는데 쉽게 마실 수 없는 분은 많이 힘들 것입니다. 시중에는 lactose free 제품이 제법 공급되고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즐길 수 있는 좋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도 저도 다 적응되지 않는다면! 또는 allergy가 있다면! 방법은 하나, 회피라 하여 먹지 않는 것뿐입니다.
새벽에 QT를 하다가 문득 지금 이 글의 내용과 비슷한 맥락을 묵상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이라는 좋은 습관도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몸이 붙게 만들면 어른이 되어서도 불편이 없이 행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내 영성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 알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적용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다면 답답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죄로 연결되는 습관도 내게 아무 유익이 없으니 회피하고 접하지 않아야겠구나 싶었습니다.
노출이 반복되다 보면 담대해질 것이고 담대함이 또 반복되다 보면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도 차차 익숙해질 게 분명합니다. 좋은 것이라면 모를까 죄에 틈을 준다면 안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