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입니다.
저는 글씨를 쓸 때 눌러쓰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이가 얇으면 다음 장에 잘 박힐 정도이고 그 말은 곧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조그만 배 스르르 물 위에 미끄러지듯 빨리 쓰지 못합니다.
이런 필기 습관은 나에게는 피곤한 스타일일 것입니다. 우선 손가락이 아프고 오래 쓰다 보면 관절과 어깨도 아픕니다. 학생 때 특히 대학생 때나 인턴, 레지던트 때 필기한다든지 오더를 내고 처방전을 서야 할 초년의 의사 시절까지는 세 번째 손가락의 손톱 옆은 늘 눌려있는 상태였고 그 흔적은 이 나이가 되어도 남아있습니다.
바쁘다 못해 일 분, 일 초가 아쉽던 그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필체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잘못 읽을 수 없던 내 글씨가, 가독성에서 늘 뒤지지 않던 내 글씨가 점점 지렁이처럼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문의가 되고 내 아이가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그 무렵부터 이러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습관이 참 무서운 게, 펜을 집어도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필기감을 우선으로 삼았고 세필용 펜은 조금은 빡빡하기에 최소한 0.7mm 이상의 볼펜 심을 선호하다 보니 어느 날 바라본 내 글씨체는 상상 이상으로 많이 망가져 있었습니다.
나는 물론이고 남들이 읽을 수만 있으면 되잖아! 굳이 필체까지 좋아야 할 이유가 있어? 요즘 같은 시대에 키보드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누가 그렇게 손 글씨에 정성을 쏟을까? 그리 언급해도 반박을 할 수 없긴 합니다.
직장에서 젊은 친구들의 글씨를 보며 오히려 제 생각을 더 굳히게 된 계기가 됩니다. 더 나아가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글씨체라 할지라도 글씨체로 그들의 성격도 대략 유추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글씨는 잘 쓰는 게 아닌, 정성스럽게 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명필(名筆)이냐, 악필(惡筆)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성을 다한 글씨는 벌써 마음으로 읽히는 법입니다.
언젠가 TV를 보다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옛 선조들의 서예 작품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붓으로 정갈하게 써 내려간 작품은 정말이지 예술이었고 그래서 이를 서예(書藝)라 부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발견이랄까요? 매국노로 알려진 이완용도 글씨를 잘 썼다고 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작품을 보여주면 한결같이 명필이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글씨의 주인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명필이라 하지 않습니다.
글씨는 개인의 마음이요, 얼굴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써내는 연습을 해야 하겠습니다. 최소한 상대방이 알아볼 수는 있어야 남들을 배려한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