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마다 넘치는 분양...
운동이나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목의 대로변에 강아지를 분양, 판매하는 가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퇴근길에 공실로 남아있던 가게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는데 이 또한 반려견과 반려묘를 분양하는 가게입니다. 이쯤 되면 가히 열풍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가구가 늘다 보니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가게 몇 개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폭풍과 같은 하나의 유행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인간 세상으로 치면 (좋게 말해) 아파트나 빌라로 표현할 정도의 박스형 컨테이너 안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다양한 種의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자는 모습, 꼬물거리는 모습, 물 마시고 먹고 하품하는 모습까지 예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미 품에 있으면 좋으련만 어차피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어서 빨리 만나면 좋겠다, 정도의 바람만 가지는 중입니다. 한 편으로는 또 그런 생각을 해보는 중입니다. 과연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얘들은 어찌 될 것인가? 말입니다. 물론 더 이상 이에 대해 찾아보거나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행여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한 편으로는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개를 키워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새로 이사한 집에서 스피츠 견종을 그냥 두고 갔는데 며칠 키우다가 짖기도 너무 짖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생의 다리를 무는 바람에 원래의 주인을 수소문해서 돌려보낸 일이 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누군가가 새끼를 낳았다면서 발바리 어린애를 한 마리 우리에게 분양해 주었습니다. 그 발바리가 늙어서 집을 나간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개를 키우지 않습니다.
여동생들은 결혼 후에 강아지를 키우는데 이제는 바로 밑의 여동생만 개를 키울 뿐 제 주위에는 이제 개를 키우는 집은 없습니다. 저도 알레르기만 없다면 키워 볼 요량은 있지만 이게 예뻐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요, 책임감 있게 키울 자신이 있느냐 물으면 자신이 없어 그대로 지내는 중입니다. 산책이나 운동길에 다른 집의 개를 보는 일로도 충분한 만족을 느끼는 중입니다.
만약에 키우게 된다면 사실 저는 중, 대형 견을 더 좋아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라면 대충 이렇습니다. 진돗개나 풍산개, 사모예드, 셰퍼드, 그레이트 피레니즈 등이 좋습니다. 하지만 개인주택이나 전원주택 정도가 아닌 이상 아파트에서 그만한 개를 키운다는 건 서로 불편한 일입니다. 더욱이 덩치를 떠나 한 생명을 책임지고 키운다는 건 어찌 됐든 일상적인 마음가짐만 가지고는 참으로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저 어릴 적 마당 한구석에 묶어놓거나 풀어놓는 차원도 아니요, 밥을 먹다 남은 걸로 대충 먹일 일도 아니며, 예방주사 한 번도 맞추지 못하는 무책임, 산책 한 번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무심함으로 키울 일 또한 전혀 아닙니다.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른 길로 오다가 급기야 고양이를 분양하는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강아지 예뻐하는 것처럼 그냥 마음으로만 예뻐해도 충분한 일이지만, ‘빨리 분양되어야 할 텐데!’ 싶어지는 게 괜한 오지랖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집니다. 만에 하나 강아지나 고양이가 마치 공장에서 생산되듯 분양된다면 그 또한 맘에 큰 아픔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또한 가게에서 물건을 사 오듯이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예쁜 것이 많고 아름다운 것도 많으며 품어 주고 싶은 것 또한 많지만, 그만큼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우리가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람처럼 노릇하고 주인처럼 노릇하기가 더욱 어려운 세상을 우리는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