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다루기 레시피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수다에 빠질 수 없는 소재는 ‘사랑하는 연인’ 혹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
집돌이인 남자가 최고야.
자신의 남편과 남자 친구는 ‘집돌이’라서 만족도가 크다고 말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 멈칫했다.
‘어쩌지, 내 남편은 집돌이 아닌데.’
그렇다. 내 남편은 집돌이가 아니다. 여행, 캠핑, 서핑 등 다양한 레저 생활을 즐기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 모임, 직장 동료 모임이 4개 이상 있다.
친구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집돌이 남자가 최고’라는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남편을 잘못 선택한 것인가' 하는 내 선택에 대한 의구심, '내 남편은 왠지 가정에 소홀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불현듯 찾아온 이 감정의 정체와 근원이 궁금했다. 파고 파보니 실루엣이 뚜렷해졌다.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퇴근 후 집에 바로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다. 친구들을 만나 노름을 하거나 술 마시는 일이 아이를 키워 내거나 집안일은 도모하는 것보다 먼저였다.
엄마의 생신이나 결혼기념일에도 같았다. 저녁을 먹으러 약속을 잡아 놓고서는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러다 보면 통화연결음 대신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강력한 경고가 모두를 실망하게 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내가 어렸을 때 보고 자라온 부모님의 모습은 내 삶에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 이정표를 따라 고른 남자였다. 아빠랑 다른 성향과 다른 취향, 다른 외모를 가진 남자. 그와 함께라면 엄마, 아빠랑은 다르게 살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고르고 골랐건만. 남편도 反집돌이라는 점이 아빠랑 너무 비슷해 보여 초조했던 것이다.
혼수처럼 가져온 침침한 무의식의 기억들이 나를 괴롭히고, 남편까지 괴롭히게 둘 순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모임을 끝내고 귀가했다. 샤워를 하고 편안한 룸웨어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 털썩,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남편. 지금이 말할 기회였다.
“(매우 조심스럽게) 오빠, 나 오빠한테 말할 거 있어.
"응, 뭔데?"
"나는 어렸을 때 보았던 아빠의 모습들이 오빠에게 조금이라도 오버랩될 때, 오빠랑 아빠가 다른 걸 알면서도 불안해져...”
“응, 그게 뭔데?(당황)”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이 많은 거. 우리 아빠가 맨날 늦게 들어오고 엄마랑 싸웠던 게 계속 생각이나,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건 오빠에게 모임 줄이라고 말하는 건 아냐.(단호)”
“그럼~?”
"내가 원하는 건 오빠가 아빠 같아 보여서 불안해질 때, 오빠가 지금처럼 내 마음을 잘 들어주면 좋겠어. 듣고 효리 걱정됐겠다. 이 말만 해주면 돼. 어때 괜찮지?”
“음.. 오늘 내가 모임 갔다 와서 생각이 많았나 보네? 알았어, 그럴 때 잘 들어줄게. 그리고 나 아기 생기면 아예 이런 친구들 모임도 안 갈 거야. 그리고 효리 알잖아, 나 장인어른이랑 달라. 모임 가기 전에도 늘 효리한테 허락받고 가고, 언제나 효리 먼저잖아.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꽉 안아주면서) ”
남편의 따뜻한 말과 포옹으로 나의 불안감은 삽시간에 진화되었다.
그림자를 떼어 내고 싶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떨쳐 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어쩌겠는가. 안고 살아야 한다.
다만 이 어둠으로 내 소중한 가족이 다치거나 우리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불편한 마음을 혼자 삭히며 참고 싶지도 않다.
참다 보면 가시가 더 뾰족해져서 만들지 않아도 될 싸움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았지만, 내가 원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멀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를 말해보기로.
숨겨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아픔과 내면을 풀어내고 나눌수록, 더 질기고 끈끈한 사이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
바로 ‘남편’이다.
나에겐 걸리적거리는 그림자가 있지만,
그림자 덕에 남편과 더 친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