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커먼즈<1-3> 커먼즈 생태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앞 글에서 이어집니다. )
이렇게 커머너(commer)들이 모여 특정 니즈에 부합하는 커먼즈가 생기면 비슷한 유형의 커먼즈가 늘어난다. 법제화의 니즈가 생긴다.
한살림 역사를 통해 보자.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1986년 사람들이 모였을 때만 해도 공동의 자산은 서울 제기동의 ‘한살림농산’이라는 작은 쌀가게뿐이었다.
이들이 한살림생산자협의회,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을 설립한 1988년만 해도 근거법은 없었다. 생협과 연합조직이 140여 개에 이른 1998년에 이르러서야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하 생협법)이 제정됐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2019년, 한살림 소비자조합원은 69만여 명으로 늘었다. 생산자는 2230세대, 생산자 공동체는 121개에 이르렀다. 이제 한살림은 출자금 690억 원, 매장 225개, 자체 물류센터 9400평을 공유하는 큰 살림이 됐다.
법·제도적 기반은 커먼즈를 키우는 또 다른 토양이다. 실제로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돼 이전보다 다양한 사회적경제조직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후 한국에선 이전보다 다양한 형태의 커먼즈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협동조합은 주식회사처럼 설립 등기만 해도 만들 수 있게 되자, 1만5000여 곳으로 늘었다. “전화 받는 곳이 6000여 개, 제대로 운영되는 곳은 2000여 개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후죽순 생겼다.
그러나 그 중엔 마을언덕사회적협동조합이나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처럼 새롭게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지역에 공동체를 늘려가는 곳도 있다. 제주 선흘리 사회적협동조합처럼 몇 세대에 거쳐 커머닝했지만 국유화된 공간을 국가로부터 위탁 받아 관리하기 위해 조직화한 곳도 있다.
다양해진 커먼즈는 더 다양한 법적 기반을 요청하고 있다. 한 예로, 학회 커먼즈들은 오픈액세스에 대한 공공 부문의 지원과 법제화를 요구한다. 한국기록관리학회 등 문헌학 단체들과 대한의학학술지 등 의학계, 지식공유선언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학회 홈페이지, 논문 공유 플랫폼을 기반으로 자신이 쓴 논문부터 무료 오픈액세스 즉 누구나 볼 수 있게 개방하며 지식 커먼즈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픈액세스가 확산되려면 법과 제도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연구재단 등 공공 부문은 연구비, 출판비 지원, 연구 평가를 통해 학회들의 오픈액세스에 인센티브를 줘 이들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이나 유럽연합(EU) 국가들처럼 공공자금 즉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연구성과물에 대해선 오픈액세스를 강제해 더 많은 이들이 과실을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금융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생겨난 공제단체들과 사회적경제 연구자들은 자생적 공제조직이 법적 지위를 인정 받을 수 있는 법 마련을 요구한다.
2019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지역자활센터의 자활사업 참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주민협동회와 그 전국조직인 전국주민협동연합회, 한국사회적기업중앙협의회 공제사업단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단체의 공제사업을 위한 법 기반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연구자들은 2019년까지 계류됐던 사회적경제기본법 안에 공제사업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 공제조직을 자율적으로 설립할 수 있도록 공제기본법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에 공동체 공간을 확보하려 직접 공간을 매입해 커먼즈를 시작했던 조직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동산 가격과 자금 조달 비용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은 “주민들이 민주적인 운영체를 지속가능한 사업방식을 통해 조성하고 운영해나갈 역량을 조성한다면 행정은 그 하드웨어를 위한 조건들을 지원해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사회적 부동산 관리조직을 법제화하자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국토연구원의 한 보고서는 2018년 “지역공동체가 사회적 목적을 가진 부동산의 소유·운영자가 되어 사회적 임대업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 주체들의 활발한 활동을 지원하는 기반을 만들도록” 사회적 부동산 관리조직의 법적 기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커먼즈가 발달한 국가에선 부문별로 법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유럽연합,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공제보험법이나 보험감독법 등 관련법으로 공제회의 법적 지위가 분명한 국가에선 자생적 공제조직이 좋은 상품으로 영리적 보험회사와 경쟁한다.
지역공동체를 위한 공간 역시 법적으로 보호 받는다. 영국에서 2011년 제정된 지역주권법(Localism Act)가 한 예다. 이 법은 지역사회에 가치가 있는 토지와 건물에 대해 주민공동체가 우선 매입할 수 있는 권리, 사적 매매를 제한하도록 청원하는 권리를 보장한다.
전은호 목포 도시재생센터장은 이 법에 대해 “국유와 사유 사이에 있는 공동의 공간에 대해 지역 공동체가 유형의 자산을 확보하고 계획을 수립해 운영하는 권리를 우선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한 법 제도”라고 평가했다.
빈곤, 불평등, 고령화, 기후 위기, 자산 독점 등 거대한 문제들을 풀기에 커먼즈라는 해법은 몰려오는 파도 앞에 선 작은 배처럼 약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처럼 사회보험이라는 구명조끼조차 없이 격변의 파도 앞에 선 사람들에게 커먼즈는 지금 여기서 가장 가깝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협력과 연대를 통해 격랑을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둥지다.
커먼즈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정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이렇게 썼다.
“공유자원(커먼즈) 자체에 힘이 있는 게 아니라 공유자원을 둘러싸고 취하는 인간의 행동이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커머너들의 커머닝이 어떻게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바꾸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그들이 일으키는 변화가 긍정적이라면 그 임팩트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킬 수 있도록 법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커먼즈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프란치스 카프라와 우고 마테이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생태적 행위를 더 호소력 있게 만들 새로운 서사와 더불어 광범한 공동체의 저항과 네트워킹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법 체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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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1986년 12월, 한살림의 모체인 쌀가게 ‘한살림농산’이 서울 제기동에서 문을 열었다. (사진제공=한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