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커먼즈<1-2> 한국의 커머너(Commoner)는 누구인가
‘커먼즈(commons)’라는 단어가 수입되기 전부터 한국인은 커머너(commner)였다. 과거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공동노동조직 ‘두레’를 꾸려 공동경작지나 마을 숲을 가꿨다. 지금도 한국의 노년이나 장년층은 곗돈을 부어 목돈을 마련하거나 여행계(契)를 꾸려 함께 여행을 떠난다.
옛날엔 마을마다 커먼즈가 있었다. 마을 사람 누구나 물 길러 가던 우물에선 길 가던 나그네도 물을 청해 마실 수 있었다.
우리가 쓰는 ‘동네’, ‘마을’이라는 말에도 물, 나무, 밭 같은 커먼즈의 자취가 남아 있다. 동네의 어원은 ‘동내’(洞內)인데, 여기서 한자 ‘동(洞)’은 같은 물을 마시는 곳을 뜻한다. 마을의 어원은 물을 뜻하는 아래아(·) 표기 '말’이다. 즉 물을 공유하는 곳이 마을이다.
한자로 마을을 뜻하는 ‘촌(村)’은 나무를 일정하게 심어 놓은 곳이고, ‘리(里)’는 땅에 밭을 일궈놓은 곳이라는 뜻이다.
물과 자원이 귀했던 제주도에 한국형 커먼즈의 원형이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1960년까지 제주의 “마을사람이란 즉 물 공동체”였다.
특히, ‘곶자왈’ 즉 제주의 숲은 제주 사람들에게 생계의 자원을 제공하는 전형적인 생계자급 커먼즈(subsistence commons)였다.
한 예로, 선흘곶 동백동산을 보자. 동백동산에서 선흘리 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나무로 숯을 구웠다. 숯 생산 규모는 꽤 커서, 숯은 제주 다른 지역 주민들과 경제적 교환활동에 쓰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숯을 팔아 제주 읍내에서 농산물을 샀다. 공동노동, 공동거주를 위해 주민들은 계(契), 품앗이 조직을 조직하면서 규칙도 만들었다. 그중엔 ‘자원을 이용하고 관리하는 규칙’도 있었다.
동백동산이 람사르보호습지 겸 환경부 생태관광지로 지정된 이후 주민들은 선흘리 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해 환경부와 함께 생태관광 사업을 진행하면서 수익을 주민 복지에 쓰고 있다.
‘공동경작지에서 공동노동으로 성과를 내 공동으로 분배하는 규칙’은 뭍에도 있었다. ‘두레’다. 과거의 한반도인들은 마을 경작지 전체를 공동으로 경영하는 농지로 봤다. 그래서 함께 농사를 짓고 경작물을 나눠 가졌다.
노동을 마친 후엔 ‘공동회연’ 즉 모여서 함께 놀았다. 공동노동의 성과물은 투입된 가족 노동력에 따라 규칙을 정해 나눴다. 토지의 사유화와 함께 규칙은 바뀌었다. 자기 농지보다 넓은 농지를 경작해줬을 때엔 그 차액을 계산해 임금으로 받게 된 것이다.
때로 임금은 공동기금으로 적립해 마을 공동의 일을 하는 데에 썼다. 공동의 땅에서 성과물을 내 구성원에게 분배하는 규칙이 있었다는 점, 토지의 사유화와 함께 원래의 형태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역사 속 두레는 서양의 커먼즈와 닮았다.
역사 속의 계는 커먼즈 연구자 데이비드 볼리어가 말하는 시민적 커먼즈(Civic Commons)와 비슷했다. 신라시대 이래 계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돕기 위해 만든 협동체였다.
화랑이나 불교도들의 대회나 상조회 역할을 했던 ‘향도(香徒)’, 기부 받거나 공동각출한 자산을 운영해 법회를 열거나 사회사업 혹은 대부사업에 썼던 ‘보(寶)’는 커먼즈처럼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동자산을 모아 관리했다.
목돈 마련이나 친목을 위해 모이는 현재의 계와는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해, 역사 속 계는 이해관계자 공동체의 상부상조 기능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공제회와 유사점이 있다.
한반도 커먼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두레와 계의 전통은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살아 있던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병합 후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토지 사유화라는 울타리(Encloser)가 높아졌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 이후 자작농이 등장하고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 이후 수출산업 중심으로 젊은 노동력이 이동했다.
‘생계자급 커먼즈(Subsistence Commons)’로서의 마을은 차츰 형해와됐다. 형태만 남고 함께 추구하던 가치와 의미는 사라져갔다.
‘공통의 생활공간에서 유사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 즉 공동체도 급격히 줄었다. 공동체는 마을, 친족 단위에서 가족, 직장 단위로 쪼그라들었다가 1인 단위로 쪼개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신용대란 이후 ‘개인보증’으로 얽혀 있던 친족, 가족 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족 공동체 자체도 줄었다. 2인 이상 가구는 1975년 95.8%에서 2019년 70.2%로 줄었다.
같은 기간, 1인 가구 비중은 4.2%에서 29.8%로 늘었다. 통계청은 2047년엔 전체 가구 중 37.3% 즉 세 집 중 한 집 이상이 1인 가구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과거에는 공동으로 관리할 물이나 숲 같은 자연자원 혹은 공동경작지 같은 공동의 자원, 즉 ‘공동의 것’이 먼저 있어 그것을 기반으로 공동체가 생기고 커먼즈가 운영됐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동자원이, 그걸 운영할 공동체가 공동자원 운영 체계보다 먼저 있었다. 공동의 자원도, 공동체 기반도 무너지고 있는 한국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커먼즈는 무엇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걸까.
현재의 커먼즈는 커머너로부터 시작된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 커머너들, 공유인들이 공동의 자원이나 자산 없이도 커머닝을 시작한다.
이들은 공공 부문에만 기대기엔 너무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예를 들어 기본적인 주거 복지나 의료비의 확보, 기후 위기 대처, 생태 보전-를 함께 풀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자산을 나눈다.
서울 홍은둥지공동체주택을 사례로 보자. 먼저, ‘마을 주민들의 공동 공간을 만들자’는 목표를 공유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공간을 임대해 ‘거북골마을사랑방’을 만들었다.
그러다 ‘월세 대신 이자를 내더라도 공동체 공간을 자산화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일부는 살던 집 전세보증금을 뽑아 공동 건물에 입주하기로 했고 일부는 그들에게 여윳돈을 융자해줘 재정에 힘을 보탰다.
입주자들은 협약서로 소유와 운영원칙을 정했다. 입주자들과 참여자들은 마을언덕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해 공동체주택와 공동체사업 운영의 법적 주체를 세웠다. 이들은 각자 자기가 꿈꾸던 주택뿐 아니라 마을 주민 공동의 부엌과 거실도 얻게 됐다. 커머너 즉 사람이 이 커먼즈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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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 노동력을 교환하는 품앗이와 달리 과거의 두레는 공동경작지를 일구는 공동노동조직이었다. 한 마을의 성인 남자들이 농사를 짓고 부녀자들이 길쌈을 하며 협력하는 전통은 청년들이 산업화된 도시로 빠져나간 후에도 남아 있다가 21세기 들어 일용직 일손을 사서 쓰는 형태로 바뀌었다.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