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전자우편을 열어보는 것이다. 홍보팀에서 정리한 업무 관련 뉴스 스크랩부터 타 팀, 타 기관, 팀원들이 보내온 메일을 읽고 답을 한다. 십여 년 전, 제일 바쁜 팀을 맡았을 때는 하룻밤 새 쌓이는 메일이 30-40통 가까이 되었고 주말을 거치면 100통이 쉽게 넘다가, 잠시 휴가를 가거나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페이지를 몇 번을 넘겨야 할 만큼 많은 메일이 쌓였다. 그때는 모바일로 쉽게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랩탑(laptop)으로 메일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출장 가서 일정 후 밤늦게 호텔에 돌아와 메일을 확인하고 회신하는 일이 흔했다. 그날, 그날 열어보지 않으면 나중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메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시급성이 좀 덜한 것들이었다. 아주 급한 것들은 전화나 문자가 왔다. 그런 이유로 휴가를 가서도 매일 회사 메일을 확인하고는 했다. 복귀 후 쌓여있는 메일함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수의 메일 목록을 보면 질리는 마음에 갑자기 일하기 싫어지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휴가라도, 주말이라도 틈이 나면 메일을 열어봤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었다.
요새는 모바일 시스템이 너무 잘 갖춰져 있어서 버스로 이동하면서도 메일을 보고 전자결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더 쉽게 접속했다. 메일을 보고 답이 필요하거나 업무 지시를 해야 하는 일은 바로바로 답을 보냈다. 어떤 때는 출근하면서도 미리 메일을 열어보고 답을 하고는 했다. 직원들은 휴가인데, 주말인데 왜 회사 메일을 열어보냐고 했다. 왜 일을 하냐고. 처음엔 그게 워크홀릭(workholic)인 나를 위해 ‘좀 쉬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메일에 대해 답을 하는 팀장이 싫었던 것 같다. (난, 출근하면 보라는 의미로 보냈고, 나중으로 미루면 잊어버리게 될까 봐 그 자리에서 회신을 보낸 거다. 그걸 주로 메일로 보내지 않고 톡으로 보낸 게 문제였겠지만. -_-;;) 그때는 그렇게 일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회사 분위기가 점점 근무시간과 휴식 시간을 분리해야 하고, 근무 외 시간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메일에 대한 회신은 주로 메일로 한다. 톡은 진짜 급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회신도 예약 메일로 걸어두어 근무시간에 갈 수 있도록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맞닥뜨렸을 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적어놓아도 놓치는 일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회신 내용을 바로 적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수신자가 거부감 느끼지 않게 예약 메일을 해 놓는다. 회사 메신저도 예약을 해 놓는다. 왜냐하면 많은 직원이 휴대폰과 연동되는 워치(watch)를 사용하면서 각종 알람을 설정해 놓는데, 회사 메일과 메신저 수신 알람을 해 놓는 직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야근하는 날, 무심코 메일 회신을 보냈는데 해당 직원이 바로 답을 한 것이다. (바로 답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미안했다.) 그들은 워크홀릭은 아닌데 완전히 꺼놓지는 않는가 보다. 최소한 난, 휴대폰에서 회사메일이나 메신저가 울리지 않게 해 놓았는데... 헛! 알고 보니 난 그 기능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다.)
올해 팀을 옮기면서는 팀 톡방을 만들지 않았다. 오로지 회사 메신저와 메일로만 소통한다. 작년부터 주말은 물론이고 휴가 때 회사 그룹웨어에 접속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피했더니 이젠 안 하게 되었다. 톡방이 없으면 엄청 불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편하다. 메일을 묵혔다가 보게 되니, 굳이 내가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나서서 하지 않으니 다른 팀으로 가는 일이 생기고, 다른 사람이 해결하는 일도 있었다. 역시 회사 일은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게 맞다. 휴가 가서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회사 업무와 거리두기 연습을 하다 문득 깨닫게 된 일이 있다. 이제는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팀장 타이틀을 같이 달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팀장이 아니다. 연령대도 다르고 경험치도 다르고 업무를 보는 시야도 다르다. 이제 시작하는 팀장도 있고, 한창 열심히 달려야 하는 팀장이 있고, 나처럼 내려가야 하는 팀장도 있다. 같은 그룹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성취지향형이고 기본적으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잘 접을 때다. 부단히 뛰고 있는 후배 팀장들을 위해 평가 점수는 밑에 깔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들이 좋은 성과를 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팀장으로서 영광의 순간을 누리기도 했으니, 평가를 낮게 받는다고 하여 내 능력까지 낮게 평가받는 건 아니라는 점을 되새겼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확인하는 메일 중에는 업무와 관련한 정보를 얻기 위해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 온라인 잡지들이 꽤 많이 있다. 관련 정보를 읽고 시사점은 물론, 향후 해야 할 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서 그것들을 읽기 위한 시간을 할애해 왔다. 요즘은 그중 몇몇 뉴스레터, 잡지를 구독 취소하고 있다. 매번 읽지 않아도 언제인가 읽어볼 요량으로 욕심껏 구독 신청했던 것, 이전 팀들 업무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식지, 현업과 관련된 것 등 수없이 많은 정보지를 수신하고 있다. 십 년 넘게 받아보고 있는 뉴스레터도 있다. 어떤 때는 읽어보고 바쁠 때는 열어보지 않고 목록에서 삭제한 적도 있다. 특히, 이전 팀 업무와 관련된 소식지는 습관처럼 목록에서 삭제했지만, 메일 수신은 했다. 순환근무이니 언젠가는 다시 관련 업무를 할 수 있고 그때는 소중한 정보지가 될 터이니 수신은 열심히 했다. 열어보지는 않더라도.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는 연습을 하면서 이러한 소식지도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열어보지도 않고 목록에서 삭제만 열심히 하던 뉴스레터를 열었다. 그리고 수신 거부 신청을 했다. 앞으로는 그 업무와 관련된 세계적 동향, 국내 타 기관의 동향 등을 제때 알지 못할 것이다. 처음 수신 거부 버튼을 클릭할 때는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다. ‘안 읽으면 되지 굳이 수신 거부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며 미련을 가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이 회사에서의 내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음을 인정해야 함을. 은퇴까지 몇 년 남기는 했지만, 곧 임금피크제 대상이 되고 팀장 직책을 유지하는 것은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음을. 회사에서의 삶의 주기는 이제 하향곡선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함을. 인생 주기가 그러하듯.
수신 거부, 구독 취소는 한 시대를 마감하는 준비로 썩 나쁘지 않은 시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