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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an 05. 2024

되돌아갈 수 없을 땐 앞으로

- 도전의 두려움과 성취의 기쁨 -

로토루아(Rotorua)는 오클랜드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관광지다. 북섬 여행을 할 때 빼놓지 않는 곳이 이곳이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많이 사는 도시이고, 마오리족이 운영하는 관광지가 많다. 그만큼 마오리족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뉴질랜드는 마오리어를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한다. 아오테아로아(Aotearoa)는 뉴질랜드를 가리키는 마오리어로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는 의미다.    

  

이곳은 30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반가웠지만, 낙후된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빈 가게가 보였고 뭔지 모르게 한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뒤떨어짐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도시는. 나처럼 가끔 오는 사람은 변함없는 도시의 모습에 옛 추억을 되새기며 좋아할지 모른다. 외려 너무 발전해 버린 모습을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 방문하는 사람들의 호감도를 높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호비튼 투어를 마치고 로토루아에 저녁 무렵 도착했다. 친구 남동생 집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얼마 전 이사 가서 빈집이라고 했다. 너무 피곤하여 저녁 먹을 때까지 잠깐 누워있었다. 왜 이렇게 쉽게 지치고 피곤해지는가 했는데, 코로나 후유증 같았다. 가끔 폐 쪽에 쓰라린 느낌이 났다. 뭔가 끼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심호흡을 크게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격리 끝나자마자 왔으니, 완전히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긴, 코로나에 처음 걸렸을 때는 후각이 돌아오는데 한 달가량 걸렸다. 피곤함을 회복하는 데도 두 달, 석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아픈 곳은 없지만, 괜히 지쳤다.


잠은 들지 않았으나 1시간 정도 누워있었더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친구 남동생, 동료들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거실로 나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친구 덕에 이번 여행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인생의 단편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 놓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타국에서 보내야 했던 애달프고 어려웠던 시간을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힘겹게 지내 온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인생에 내 친구가 있었다. 친구에게 “너 참 좋은 일 많이 했구나. 그 많은 사람을 다 먹여 살린 거잖아”라고 하자 “내가 오히려 복 받은 거지. 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줘서 사업이 큰 거니까”라고 했다. 그릇이 큰 사람은 달랐다. 포용하고 베푸는 스케일이 남 달랐다. 그걸 눈으로 직접 보고, 얘기를 들으니 친구가 더 멋져 보였다. 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일하는 친구 모습은 모를뻔했다.  

로토루아는 지열 지대라서 온천이 많다. 전체 도시에 유황 냄새가 난다. 썩는 냄새 비슷한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냄새를 온천장에서 맡으면 나쁘지 않다. 로토루아에는 유명한 온천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폴리네시안 스파(Polynesian Spa)가 가장 유명하다. 여기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저질렀던 어이없는 실수가 딸려온다.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바로 앞에 가던 사람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넘어진 사람의 성별과 연령대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what's your name?" 그때 나를 보며 황당하고 불쾌해하던 표정이란. 나는 얼굴이 시뻘게져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를 떴다.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름이 뭐냐고 묻다니. 아무리 영어가 헛 나와도 그렇지. 나름 영어 공포증은 없던 시기였는데 정말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그 순간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우스개 소리로 하게 되었다.


로토루아는 많이 와 본 곳이었다. 온천도 여러 번 했고, 주요 관광지는 예전에 다 가봤기 때문에 아쉽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 집에서 혼자 책을 읽었다. 널따란 정원과 동네를 한 바퀴 돈 후에, 정원에 놓인 테이블에 책을 놓고 앉았다.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햇살은 따사로워 봄 날씨 같았다. 책을 한참 읽다 보니 더워졌다. 그래서 그늘로 자리를 옮겼더니 쌀쌀했다. 뉴질랜드 날씨는 이렇다. 날씨가 건조해서 여름에도 그늘로 가면 시원하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친구가 왔다. 시내로 나가 점심을 간단히 먹고 레드우드 수목원으로 갔다. 그곳에 나를 내려주고 친구는 또 일 보러 갔다. 나는 밥을 먹었으니 운동할 겸 산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좀 추웠다. 숲으로 들어오니 더 그랬다. 옷을 너무 얇게 입고 왔다. 그래서 산책을 포기하고 카페에서 책을 보려고 했지만, 카페가 없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음료를 파는 것 같아 물어봤지만, 더 이상 카페 운영은 안 한다고 했다. 뭘 할까 망설이는데, 레드우드 트리 워크(Redwoods Treewalk) 안내가 보였다. 나무 허리쯤에 다리를 만들어 연결하여 그 위를 걷는 프로그램이었다.  할까, 말까 망설였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걱정되었다. 반면, 안전하게 잘 만들었을 테니 떨어질 염려는 없다며 나무 위를 걸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나무 위를 걷기로 했다. 아래서 올려단 본 나무다리의 높이가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 정도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기롭게 표를 끊고 올라갔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었다. 흔들리는 나무다리였다. 게다가 꽤 높았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동시에 8명이 건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시각에는 관광객이 많이 없어서 여러 명이 건널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와 한 여성 둘 밖에 없었다. 사람이 너무 없는 건 그 나름대로 걱정되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의별 걱정을 다하며 시작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환불해 달라고 할까 하며 또 망설였다. 그렇게 한 참을 고민하며 서 있는데, 주의사항과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가 먼저 출발했다. 난 다리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주의 깊게 봤다. 걸을 때마다 출렁댔다. 돌아갈 게 아니라면 차라리 저 여자를 따라가는 게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건 마음의 공포다. 실제로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되뇌며 발을 디뎠다.

양 옆의 줄을 꽉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최대한 나무다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지만 발을 받치고 있는 나무는 흔들렸다. 흔들리는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입을 꽉 다물고 건넜다. 다 건너자,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나무다리를 연결한 포인트마다 수목원과 나무 종류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사진 찍기 좋은 곳도 표시를 해두고 있었다. 건너편 위쪽으로 한 무리의 방문객이 지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래, 빨리 돌면 20분도 안 걸릴 거야'라고 속으로 소리 지르며 얼른 한 바퀴 돌자고 마음먹었다.  


여자는 포인트마다 엄청 꼼꼼히 주변을 돌아보고 앉아서 쉬고 사진을 찍었다. 세 번째 다리까지는 그녀가 먼저 건너기를 기다렸지만, 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코스를 끝내고 싶어서 내가 먼저 건너가기 시작했다. 돌아갈 수 없으니 전진밖에 할 게 없었다.  돌아가려면 건너온 만큼 가야 하는데, 흔들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몇 개의 다리를 건너냐 하는 개수의 문제만 다를 뿐. 그러니 어차피 건널 흔들 다리,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나았다.

내 눈에는 주변의 나무가 다 똑같아 보였다. 안내판은 불과 한 시간만 지나도 다 잊어버릴 테니 읽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리 중간에 있는 포인트에서 사진만 후루룩 찍고 빨리빨리 서둘렀다.  어디가 반환점인가를 궁금해하며 건너는데, 몇 개의 포인트 앞에 나무를 관리하는 두 명의 인부가 보였다. 밧줄을 매달고 나무 위에 올라 뭔가 영양제(?) 같은 것을 놓고 있었다.  그 여자를 뒤로하고 앞서 건너기 시작하면서 한 명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은근히 반가웠다. 인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긴장과 추위로 차가워진 손을 비볐다. 그는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공기가 좋지 않냐며. 나는 다리 건너는 일에 몰두하느라 너무 긴장되어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괜찮냐고 물으며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 다리는 정말 튼튼하다고.  그리고 곧 반환점이니 기운을 내라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곧 반환점이라니. 그에게 짧게 인사하고 얼른 건넜다.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았다. 반환점을 돌고 나자 거의 끝낸 것 같은 기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덜 무섭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나무를 배경으로 웃으며 셀피도 찍었다. 익숙해지니 여유가 생겼다. 무슨 일에나 그런 것 같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예민해진다. 누가 옆에서 말만 시켜도 짜증이 밀려올 때가 있다. "내 용량이 이미 차서 더 이상 담을 수가 없어요."를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에 익숙해지면 쉬워지고 여유가 생긴다.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그때는 또 누가 다른 부탁을 해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700미터 길이의 나무 걷기도 시작할 때는 망설임, 두려움으로 초긴장되었다가 반환점을 돌면서 여유를 찾기 시작하여 끝내고 나니 성취감에 뿌듯했다. 참, 단순한 진리를 새삼스럽게, 매번, 깨닫는다. 무엇이든 시작할 때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또 단순한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니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해보면 별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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