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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Aug 22. 2024

45cm와 1.2m의 거리

신체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개인 공간(퍼스널 스페이스, personal space)이 있다. 타인이 들어와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공간, 거리, 범위. 나무위키에 따르면, 45cm 미만은 친밀한 거리로 가족, 연인, 친한 친구를 허용한다고 한다. 45cm~1.2m의 개인적 거리는 친구와 지인을 허용하는 거리이고, 1.2~3.6m는 사회적 거리로 친하지 않은 사람(동료, 낯선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는 거리라고 한다. 공적인 거리는 3.6m 이상으로 대중연설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거리라고 한다. 이 구분은 친밀도에 따라 편안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45cm는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아주 친밀한 사이다. 개인적 거리는 언제든 팔을 뻗어 만지거나 안을 수 있는 거리, 사회적 거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관계지만 한발 다가서면 팔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다. 완전 타인은 3.6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나의 연결망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1.2m 안에 들어온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다. 취향을 공유하는 경우는 3.6m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한발 다가선다면 손을 잡을 수 있다.    

  

사람마다 이렇게 허용할 수 있는 퍼스널 스페이스가 있는 것처럼 각자 편안한 심리적 거리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45cm 미만은 심적 안정을 줄 수 있는 관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허물없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 이런 관계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1.2m 거리를 지향한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신체적 거리처럼 심적 거리도 그렇기를 바란다. 이 심리적 거리는 서로 민폐 끼치지 않기에 좋은 거리다. 나는 남에게 폐 끼치기 싫은 만큼 누가 내게 민폐 는 일도 싫다. 내가 정의하는 민폐란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내 것을 주장하고 받아들이게 만들어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일방적 주장을 삼가려면 거리가 있는 게 편하다. 엄마와 딸이 대체로 애증의 관계인 까닭은 각자 원하는 바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보다 내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매일 겪는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부딪힘이 45cm의 심적 거리에서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내가 침해받지 않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1.2m의 거리는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기 좋은 거리다. 내게 느슨한 관계란 개인의 신체적 공간이 필요하듯이 심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45cm 미만의 심리적 거리는 부담스럽다. 아주 친하고 빈번히 만나는 사이라도 일거수일투족을 나누지 않는다. 친구가 무슨 스트레스로 힘든지 알지만 매일 상황을 확인하고 그날의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지 않는다. 해결해 줄 수 없으면서 약 올리듯 그 스트레스 상황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친구가 원할 때 얘기를 들어주거나 기분전환 할 수 있게 이벤트성으로 맛있는 걸 먹거나 여행을 가거나 할 뿐이다. 그것도 내 생활이 있으므로 매일, 자주 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오히려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실연의 고통으로 힘들었을 때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친구보다 좀 더 거리가 있는 친구에게 찾아갔다. 나를 이해할 만한 친구가 꼭 심적 거리 45cm 안에만 있는 건 아니다. 가치관, 살아온 경험, 취향, 성향이 다르므로 심적 거리가 가깝다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안에 따라 3.6m 밖에 있는 사람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혼자 사는 친구, 후배들이 모여 살자고 종종 말한다. 혼자뿐만 아니라 남편, 자식이 있는 후배 다희도 그렇게 말한다. 형제자매, 자식, 남편이 있어도 더 늙은 후에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살자는 것이다. 같은 집에서 복작복작 부대끼며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살며 아플 때 서로 들여다보고 같이 놀러 다니며 살자고 한다. 수억 원의 보증금과 수백만 원의 관리비를 내야 하는 실버타운은 고만고만한 경제력을 지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함께 모여 살자”라는 건 좀 더 현실적이다. 어떤 친구들은 벌써 같은 오피스텔을 샀다. 나중에 같이 모여 살 목적으로. 농담처럼 집을 지어 한 층씩 나눠 살자는 얘기도 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뜬히 자기 몸 건사하며 살 수 있지만, 움직이기 힘들어지는 때가 오면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은 서로 마음을 의지하며 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다. 우리가 나중에 결국 혼자가 되더라도 혼자로 남지 말자는 것이다. 서로의 취향, 습관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질척거리지 않을 정도의 끈끈함과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두는 느슨함으로 노후에 모여 살자는 얘기는 귀가 솔깃해진다. 그때는 어쩌면 느슨함의 거리가 45cm로 좁혀질지도 모르겠다. 노화로 팔을 뻗기 어려워질 수 있기에 바로 옆에서 서로를 보듬어야 할 날이 도래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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