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현실이 만날 때
그날은 비가 무척이나 많이 내렸다.
떨어지는 빗방울로 이른 저녁 도로 위를 밝히는 차량의 불빛들은 아스팔트 위로 거칠게 튀어 올랐고 도시의 불빛은 뭉개지듯 흩어졌다.
“ 수정동 주민센터로 가주세요. “
택시기사는 요청받은 장소가 본인 역시 생경한 느낌이었다. 휴대폰으로 네비를 찍고 찾아 가지만 어찌나 길이 좁고 복잡한지 결국 우리가 도착하고자 했던 장소와 택시가 우리를 내려준 장소는 차이가 있었다.
차에서 내려 남쪽으로 북쪽으로 좁은 골목골목을 오르락내리락. 어스름한 비 오는 저녁, 우리는 산복도로 위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난 그날 저녁 그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마치 꿈속의 풍경 같은 현실의 풍경. 부슬부슬 비 오는 좁은 산복도로 위, 아지라히 연약한 빛을 내는 오래된 가로등.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이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버스 한 대. 어쩌면 토토로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만남의 장소 <모티> 조차도 지브리에서나 나올 법한 외관의 작은 지하술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면 예약자의 이름을 묻고 그러면 문이 열리는 그 모든 것이 은밀한 약속이 진행되는 듯한 느낌. 손 한 뼘만 한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반기는 것은 턱시도 고양이와 그의 벗인 배 나오고 푸근한 마스터 그리고 일본가수가 부르는 이국적인 재즈. 이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현실에 찌들어 있던 나를 이 세계로 인도하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판타지를 꿈꾼다. 어린 시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피터팬은 책 속에 그리고 내 상상 속에 있었지만 이 순간 나의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은 결국 꿈속에서나 봤을 법한 풍경과 현실이 만날 때인 듯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장소에서 ‘위스키’를 혹은 ‘술’을 이야기하기에 마땅했다.
술은 결국 반대로 현실의 풍경을 꿈처럼 보여주기 때문에.
난 사실 위스키에 큰 관심이 없었다. 위스키라고 한정 짓기보다는 술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술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즐겨마시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안 마시거나 못 마시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밤새어 술을 마셔본 적도 없거니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본 적도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평생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못난 모습에 대한 내 안의 오이디푸스가 금기시했던 것일까. 아니면 비싼 술을 좋아하지만 사서 마시기에는 아까운 나의 프롤레타리아적 근성이 금기시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나의 내면에 또 다른 자아는 디오니소스가 벌이는 축제처럼 사람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욕망한다. 그래서 껍데기를 탐닉하는 변태처럼 술의 역사와 신화에 대해서 읽고 술을 즐겨마셨던 과거 영웅들의 이야기를 동경하는 것일지도.
버나드 쇼는 위스키를 ‘액체로 빚은 햇빛이다’라고 말했다. 글렌케런에 담긴 위스키를 실내조명에 비춰 보면 버나드 쇼가 말한 대로 글라스에 햇볕을 담아 놓은 듯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혼자서 집에서 위스키를 따라 마실 때 그 햇볕이 담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스키가 햇볕과 같이 눈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장소가 수평선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날 마셨던 위스키의 종류와 맛은 희미하지만 아직 기억난다. 하지만 그날 마셨던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그 체온은 평생 잊혀지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