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디아워스

비관적으로 하는 긍정적인 다짐

by 우엥

회사를 가고, 점심 시간엔 헬스장에 가서 속옷이 젖도록 운동을 하고, 집에 와서 게을러지기 전에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주말에 식단을 짜서 장봐둔 음식으로 저녁을 해먹고, 씻고, 책 읽다가 잠들고.

매일 복사 붙여넣기 해놓은 것처럼 반복되는 나의 평일 스케줄이다. 이런 일상이 주던 뿌듯함과 단단한 기분도 이제 익숙하고,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리며 느끼던 기분들도 이제 관성이 되었다. 나에게 기쁨을 주던 것들에 무덤덤해져가고 이렇게 내 시간을 채워주던 행동들에게서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시간은 정말 시간 그 자체로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 앞에 시간이 그저 시간으로만 존재하는 게 느껴질 때, 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생각을 하는 동안 뒤에서 고요하던 시간이 그 본모습을 떡하니 드러내놓은 것 같은 순간을 마주할 때, 나는 이러다 금방 노인이 되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죽음이 무섭다거나 두렵다거나 한 기분은 아니고, 내가 죽는다는 고정된 사실이 머지않아 마주할 임박한 사건으로, 그러므로 다급히 무언가를 해야 될 것만 같은 기분.

그리고 이건 괜한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한번 더 실감하게 되고 그러고나면 세상이 그저 환상같아 보인다. 진지하게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좋은것은 역설적이게도 현재에 최선을 다할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좋아하는 모든게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그러므로 내가 아주 내 마음대로 살아버려도 세상은 어찌나 그대로인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얼마나 뭘 어떻게 하든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점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낙관적이게 된다. 성실함 그 자체에 뜻이 있고 그게 가져올 결과물이나 의미는 없다고 생각할 때의 편안함.



난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씩씩하게 이겨낸 사람 역할이 좋으면서도, 씩씩하면 어느 정도 이겨낼 법한 고생인게 감사하면서도 저 역할이 지긋지긋하다. 어릴 땐 저 역할이 가진 드라마성이 나를 움직이게 했는데, 지금은 그래서 언제까지 해야하나요 전 이제 소녀도 아니고 내가 청춘만화 주인공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는데요 처연하게 물을 때도 있다. 내가 씩씩하게 마구 이겨냈더니 세상의 난이도가 올라가는 식으로 나를 제자리에 있게 한달까


그래서 난 그저 내 앞에 놓인 시간이 그 본모습을 드러내서 나를 아연하게 하지 않도록, 루틴들을 통해 시간을 저 뒤로 내 눈에 안 보이게 숨기고 하루하루를 대충 살려고 한다. 의미를 찾는 게 의미가 없다. 그냥 적당히 성실히 살다가 죽어서 별이 되면 좋겠다. 별이 되면 시간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고, 시간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불가능하다면 별도 되지 않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은 성실히 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성실하지 않으면 무지막지한 시간과 독대해야 한다. 앞으로도 성실하게 살아야지.

비관적인 기분으로 하는 긍정적 다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목에 점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