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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디아워스

점심 시간

by 우엥

운동을 하기 싫은 점심 시간에는 다용도실에 앉아 밥을 먹으며 책을 읽는다. 한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며 동시에 책 읽는 걸 좋아하므로, 방울토마토 같은 걸 집에서 싸들고와서. 방울토마토는 집 냉장고에서 꺼내 먹을 때보다 지퍼백에 포장해와서 회사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점심 때 꺼내 먹으면 훨씬 맛있다. 회사,점심시간,다용도실 에서 가지는 두시간의 자유시간 이라는 설정이 방울토마토의 맛을 바꾸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할 필요는 없으니 흘려보내는 말들을 은희경의 소설 속에서 만난다. 너무 내맘같은 문장에 웃고, 진지해지고, 나중에 내가 솔직한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으면 은희경의 표절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니가 쓴거라고 착각하면 안돼 리스트에 은희경 작가의 문장들을 적어놓고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표절과 표절이 아닌 것을 골라내는 작업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럼 몇 단어 차이로 간신히 표절이 아닌 문장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다용도실의 큰 창가를 따라 일자로 설치 된 테이블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소설을 읽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에 탁자가 울렸다. 창가에 앉은 사람은 두사람뿐이고, 내 핸드폰은 언제나 무음이므로 나는 놀라지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진동이 울린 것도 알아채지 못 한 사람처럼. 두번째 진동이 울리는데 내 옆사람이 꼼짝하지 않길래, 나는 내 핸드폰을 집어들어 위치를 옆으로 약간 옮겨 다시 내려놓음으로써 내 진동 아니에요 라는 사인을 주었다. 그러자 내 옆자리 사람은 어구 내껀가 소리내어 말하고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저런 행동은 나를 속으로 웃게한다. 혼잣말인척 나한테 말하는 말. 나는 니 핸드폰이 울리는 줄 알았는데 내꺼구나 나는 진짜 니껀줄 알고 가만있었던거거든


그리고 시작되는 통화의 내용이, 아이의 영어 레벨에 관해서였다. 리딩은 어쩌고 라이팅은…스피킹은…

건너편 여자의 목소리는 예의와 위엄이 둘 다 과잉해서 놀고들있다 라는 냉소가 튀어나오도록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화를 받은 내 옆사람의 리액션도 아이의 영어 점수가 안 좋다는 말에 너무나 큰 근심을 표현해서 듣는 내가 피곤해졌다. 아이의 영어 실력을 관리하는 권위있는 원장과 원장의 걱정을 두손으로 받잡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근심걱정으로 변환하는 어리석은 엄마 역할은 대체 누가 처음 세상에 등장시켰지? 엄마들의 불안으로 호황하는 사교육 시장 속 따분하고 한심한 이 상황극은 도무지 지겨운 줄도 모르고 계속된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함으로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어느새 또 사람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팔짱끼고 논평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나를 느끼면서.

이제 이 닦고 자리로 돌아가 오후 업무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방울 토마토의 맛마저 바꿔놓았던 점심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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