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실패들을 떠올려보자. 차근차근히
올해 이사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부족해서, 더 버티면 모을 수 있는 돈에 욕심이 나서 못했다.
이 원룸안에 아일랜드에서 살던 방에서부터 아테네에서 살았던 수많은 방들이 다 고여있는 것 같다.
그 방들 사이에 어떤 분절도 없이, 나는 하나의 방에서 쭉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방들의 연결을 떠올리면, 방 안에 고여있는 에너지를 떠올리면, 분명히 있었던 기뻤던 순간들도 다 희미해져 버린다.
아일랜드에서 수도에 살지 못한 것, 유럽 중앙의 주요 도시에서 살지 못 한 것, 서울에 살지 못 한것들이 나에게 변두리 컴플렉스 같은 걸 주었다.
나는 늘 서울로, 더블린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들로 떠나고
그 곳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나를 환대해주는 루틴이 일상적이다.
조용하고 외진곳에 사는 성실하고 착한 친구가 올라왔어 환영해 같은거
내가 변두리에서 내가 원하는 캐릭터 구축에 필요한 고독과 침전을 얻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끌려가는건지
중심에 살게 되지 못 한 우연들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지, 뭐가 먼저인지 이제는 알 수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지금은 변두리 정서가 완전한 내것으로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난 이제 정말로 중심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크게 웃고, 세상의 모험과 즐거움의 리더인양 살았던 내가 참,
내 모습이지만, 어떻게 그런 연기를 잘도 했니 싶다. 연기를 할 때는 그게 진짜 나인줄 알았다. 방에 불을 끄고 누워 잠에 들려고 할 때, 낮에 너무 큰소리로 얘기했던 내 모습이 나를 잠 못들게 했다.
자 다음 실패를 이야기해보자.
올해 이직을 하고 싶었는데 준비가 부족해서, 실력이 부족해서 못했다.
올해 데이터 자격증을 따고 싶었는데 게을러서, 자만하다가 못했다. 아마 자만해서 게을렀을걸.
올해는 연인을 만나고 싶었는데 못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가만히 있어도 만나지는 사람이 인연이다 라는 신념에 오류가 있는건지도 모른다.
올해는 멀어진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확실히 멀어졌다.
내 인생에 시간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었던 친구들과 멀어졌다. 나는 이 거리를 좁히는 법을 모른다.
이 또한 가만히 있어도 이어지는 인연이 인연이라는 신념의 오류를 말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우리 각자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언젠가 동시에 맞닥뜨리게 될 변곡점 혹은 절정에서 우리가 다시 관계를 회복할거라는 낙관적 예감만 할 뿐이다.
나는 올해 이직도 이사도 사랑도 우정도, 모두 얼마간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걸 차근차근 정리해보자고 마음 먹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을 지탱해주는 진짜들이라고 생각하는 직장과 월급, 운동은 계속 되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정과 사랑 같은 사치들을 다 발라내고 남는 뼈대들, 월급과 운동에서는 실패가 없었단 걸 위안으로 삼자.
쓰다보니 6개월을 넘게 혼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엎어진 것도 생각난다.
그래 올해는 그런 일도 있었다. 회사 좋으라고 열심히 한 거 아니다, 나 좋으라고 열심히 한거다
하고 씩씩하게 치워버렸지만 사실 회사가 인정해주지 않은 수십만줄의 코드는 그렇게 사장되어 버렸다.
전체 프로젝트에서 7%가 넘을 만큼 치열하게 써내려갔던 코드들이었는데 말이다.
그 코드들과 함께 내 마음도 사장시키려고 했는데, 내 노력에 끈질긴 애착을 가지는 나는 그러지 못한다.
실패들이 모여 나의 자양분이 될 거라고 확신하는 데에는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나의 실패들.
아마 앞으로 이어질 모든 순간에 관여하면서 나를 아래로 끌어당길 나의 실패들.
악의 섞인 장난기로 가득한 아이가 악착같이 줄을 끌어당기듯이.
며칠내내 비가 오는 소래포구 나의 집
갯벌의 물기가 베란다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차가운 안개를 내뿜고 있는 것 같다.
계속 눅눅한 티와 바지를 입고 주야장천 책만 읽어대는 추석 연휴.
올해는 끝나가고, 나는 나에게 무슨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구원을 찾아 책들만을 간절히 붙잡고 있고.
나의 실패들을 앞으로 좋아질거야 라는 글을 마무리 짓기 위한 희망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는 것,
우울의 기운이 어른거리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내가 가진 긍정의 힘을 끌어다가 슬픔을 잘 덮는거, 안 하련다.
우울도 내것이려니 하고 살다보면 다시 천진해지는 날 오지 않겠나
이게 지금 내가 가진 하나뿐인 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