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다. 김동률도 마찬가지다. 거장의 보편성으로 중무장한 그의 곡들은 삼복더위에 땀을 흘리며 들어도 좋다. 하지만 감수성으로 너울거리는 그 클래시컬한 사운드에 적정한 온도를 굳이 찾는다면, 그건 아마 가을이 아닐까. 그렇다고 김동률을 가을의 시즌 송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즌 송은 계절이 주가 되고 음악이 보완하는 개념이라서 그렇다. 김동률은 그와 반대다. 김동률 음악의 보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가을의 절정은 만추(晩秋)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길게 드리웠던 여름이 걷히는 가을의 초입이 더 좋다. 스산함이 조금씩 내려앉는, 가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 바로 지금이다.
홀로 걷고 있는 이 길
어제처럼 선명한데
이 길 끝에 나를 기다릴 누군가
마음이 급하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기억의 습작>이 삽입되면서 화제가 됐었다. 그러나 영화의 주제의식을 더 잘 드러내는 그의 곡은 따로 있다. 전람회 시절 발표한 이 곡. 지나간 첫사랑의 미숙함을 어루만지는 듯한 담담한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여 보자.
추운 날이 가면 알지도 모르지
겨울날의 꿈처럼 어렴풋하겠지만
잊을 순 없겠지 낯익은 노래처럼
바래진 수첩 속에 넌 웃고 있겠지
이 곡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건 분명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영감을 얻었겠구나(실제로 김동률은 하루키스트다).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 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소설 속 문장. 이 곡은 그 허무한 심상을 낭만적으로 재탄생시킨다.
널 첨으로 스친 순간
절로 모든 시간이 멈췄고
서로 다른 궤도에서 돌던
이름 모를 별이
수억만 년 만에 만나는 순간
이 앨범이 나오고 두 달 후에 난 결혼했다. 신부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던 나는 이 노래를 셀프 축가로 불렀다. 그리고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때만 해도 신곡이었어서 사람들이 이 노래를 잘 몰랐다. 나중에 음원을 들어본 신부 친구들이 말했다. “아니, 이거 이렇게 좋은 노래였어?”(...)
가진 것이 없어도 날 가득 채워주는
이 사람으로 다 된 것 같은
날 쓸모 있게 만들고
더욱 착해지게 만드는
한 번이라도 더 웃게 해주고 싶은 내 사람
김동률은 공연을 자주 안 한다. 그래서 월드컵(공연이 보통 4년 주기라;;)이라는 드립도 있다. 그런데 일단 하면 이 곡은 반드시 연주한다.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혼자 핀 조명을 받으며 그랜드 피아노를 치면서 부른다. 공연에 여친이랑 같이 갔다면 가장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다. 너무 멋있어서. 남자인 나도 떨리는데, 여자들은 오죽할까.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 살아만 준대도
그것만으로도 난 바랄 게 없지만
행여라도 그대의 마지막 날에
미처 나의 이름을 잊지 못했다면
나즈막히 불러주오
그의 수많은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단 하나. 시적인 가사, 클래시컬한 편곡, 한 치의 빈 곳도 허용하지 않는 사운드, 진정성으로 일렁이는 보컬. 난 아마 죽을 때까지 이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래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쓸려
그저 뒤돌아 본 채로 떠밀려왔지만
나의 기쁨이라면 그래도 위안이라면
그 시절은 아름다운 채로 늘 그대로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