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회사 퇴사하니 살 거 같다는 과장님.
당시, 1분기 매출 23조였던 회사.
퇴사하니까 살 거 같아. 정말 진작에 왜 안 했나 싶어. 이렇게 삶의 질이 올라갈 줄이야.
저와 같이 일하던 그 시절 과장님. 결과를 떠나서 정말 일을 열심히 하던 그분.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던 분이었어요. 외국계회사라는 타이틀에 걸맞도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그야말로 회사에 인생을 녹여내던 그분.
그동안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한다는 말씀.. 블라블라.
메일이 한통 팀원들에게 뿌려집니다. 저는 생각도 못한 타이밍이라 더 놀랐어요.
퇴사한답니다. 지금이야 저도 퇴사한 마당이라 그 심정 이해가 가지만, 그때는 정말 의아했어요. 제 나이 33살인가 34살인가에 퇴사를 하셨죠.
대리에서 과장 승진하고 2, 3년쯤 지나서였을 겁니다. 평소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했어요. 일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매 일이 어려웠습니다. 루틴 하게 돌아가는 일보다 뭔가 새로운 것들이 밀려들어오던 그 시기. 태풍의 가장자리에 서 있어서 그랬을까. 옆에서 보기에도 힘들어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나니 일종의 틱증상도 생기는 거 같더라고요. 같이 있던 동갑내기 동료분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동갑내기끼리의 무언의 경쟁심리 같은 거랄까. 개인적으로 보기엔 그런 게 느껴졌습니다. 하루하루 퀭해져 가는 얼굴. 조금씩 잦아지는 틱증상.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방침으로 업무 로테이션이 되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퇴사를 알리는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당시에 자격증 딴다고 주말에도 학원 다니며 참 열심히 살던 분이었는데.
그렇게 그분이 퇴사를 했고, 한 달쯤 지나 자격증이 사무실로 도착했습니다. 땄더라고요. 열심히 하더니 결국 땄네요. 제가 수령을 했고 오랜만에 연락을 했어요.
과장님, 잘 지내고 있죠? 자격증 왔어요.
어, 그거 내가 XX로 갈 테니 퇴근길에 잠시 만나서 나 좀 전해줘.
퇴근 후 자격증을 들고 약속장소에서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저기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네요.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근황을 물어봤습니다.
과장님~ 어유 오랜만이에요. 요즘 어떠세요?
좋아(ㅋㅋ) 너무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 싶을 정도로 좋아.
오랜만에 만난 그는 더 이상 틱증상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한 분기에 약 23조라는 매출을 내던 외국계회사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던 그였습니다. 저도 한창 회사뽕에 취해 온몸을 회사에 갈아 넣던 시기이기도 해서, 그분이 회사를 대하는 태도에 십분 공감했어요.
제가 30대 후반에 그러했듯, 그분도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이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걸까요.
퇴사하니까 살 거 같아. 정말 진작에 왜 안 했나 싶어. 이렇게 삶의 질이 올라갈 줄이야. 너도 너무 몸 상해가며 일하지 말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주저 없이 나와. 건강이 최우선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자격증을 들고 가셨어요. 이후에 듣기로, 1분기 매출 23조를 내던 당시 우리 회사와는 다르게 작은 중소기업에서 큰 스트레스 없이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한, 두 번 만났던 자리에서도 여전히 삶의 질이 올랐다며 좋아하네요.
좋은 회사를 퇴사하니 살 거 같다는 그분. 과연 배가 불러서 그런 걸까요? 제가 몸 담았던 업계에선 그래도 가고 싶어 하는 회사였는데, 여길 떠나니 살 거 같다는 그분이 잘못된 걸까요?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릅니다. 제가 지난 시절 그랬듯 회사의 간판이 뿌듯하고, 애사심이 넘쳐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유명한 대기업을 다니시는 분들이 대부분 그러하겠죠.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 중 대부분은 무언가 마음속에서, 가슴속에서 '번뜩' 하는 날이 찾아올 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의 저와 당시의 과장님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