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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Jan 07. 2024

테니스장에서의 개똥철학

 한때 <테니스의 왕자>라는 만화책을 참 좋아했다. 주인공인 에치젠 료마는 중학교 1학년. 또래에 비해서도 신체발육이 한참 덜 된 꼬맹이다. 작은 키와 짧은 팔. 왜소한 체격의 료마는 사실 미국 주니어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엄청난 실력자인데 그런 그가 일본의 테니스 명문 세이슌 중학교 테니스부에 입단하게 된다. 근데 이걸 어쩌나. 세이슌 테니스부는 1학년들이 공식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다소 비합리적인 관습이 있다. 료마는 주인공답게 그 관습을 부숴 나간다. 그가 공식 대회 출전 멤버인 2-3학년 레귤러들을 테니스로 제압하는 장면이 어찌나 통쾌하던지. 오른손으로 테니스를 치던 그가 사실 왼손잡이였다는 설정은, 아직 만화나 드라마의 클리셰에 익숙하지 않았던 청소년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가 라켓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쥘 때 나는 생각했다. 아니....... 개 멋지잖아?

      

 그래서인지 테니스라는 스포츠에 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테이블 테니스도 재밌지만 역시 낭만은 테니스지. 테이블 테니스는 군대에서 지겹도록 했으니까. 인생에서 언제 한 번은 테니스를 배워보고 싶었다. 다행히 더 늦기 전에 테니스에 입문하게 됐다. 테이블 테니스든 그냥 테니스든. 공을 다루는 스포츠는 초반에 인내심과의 싸움이 필수다. 레슨 2주 정도까지는 가히 절망적이었다. 나는 오른손잡이가 틀림없는데. 사실 숨겨진 왼손잡이가 아니었을까, 의심케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분명 저쪽으로 공을 보낸 기억이 없는데. 공이 계속 땅바닥에 처박혔다. 허리 높이쯤 되는 네트가 안시성보다 높게 느껴졌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공이 조금씩 네트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 짜릿하다. 그때부터 진심으로 테니스라는 스포츠에 재미를 느꼈다. 이 공을 네트 위로 넘기기 위해 재미없는 자세 연습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코치님께 잔소리는 또 얼마나 들었는지. 그런데 고작 테니스공 몇 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고 재미를 느끼다니. 나란 인간. 이렇게 간사할 수가. 바닥에 널린 테니스공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테니스와 내 삶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으로 테니스공이 내 말을 듣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의 의도대로, 내가 보내고자 하는 방향으로 공이 쭉 뻗어 날아간 그 순간 말이다. 취업이고. 편성이고. 연애고. 생각해 보면 인생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적이 한 번도 없던 것 같은데. 내가 노력하면 이 노란 테니스공만큼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 주는구나. 그게 묘한 위안이 됐다. 그동안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치고 또 주웠던가. 그 순간들이 보상받는구나 싶었다. 그 맛에 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한 번 테니스를 삶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게 된 탓일까. 요새는 테니스 코치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탈무드에 나오는 랍비의 명언처럼 들린다.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잔소리는 올바른 자세에 관한 것이다. 공을 네트 위로 넘기기에 급급해 연습 때 배운 자세가 무너질 때마다 코치님의 잔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건 바른 자세다. “공을 네트 너머로 넘기려고만 하지 말고 예쁜 폼으로 치려고 노력하세요.”      


 레슨 때는 포핸드 백핸드 스윙을 이쁜 자세로 잘한 것 같은데 막상 볼을 치기 시작하면 그 자세가 무너졌다. 공을 네트 너머로 넘기고 싶은 마음에 공을 급하게 맞췄기 때문이다. 왜 준비 자세에서 라켓을 뒤로 충분히 넘기지 않는지. 왜 공이 타점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는지. 왜 팔로우 스윙은 어깨 뒤로 왜 끝까지 해주지 않는지. 불호령이 떨어진다. 당장 공이 하늘로 뜨거나 땅바닥으로 처박힐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뒤따라온다. 올바른 자세로 공을 넘기지 않고 요령으로 넘기다 보면, 결국 그게 습관이 되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협박까지 곁들이는 건 덤이다.     


 그런 코치님의 잔소리가 나에게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순간을 만들어 준다. 나의 노력으로 인해,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간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었다.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느낌이다. 이 역시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동력이다. 마치 내가 지금 테니스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편성이 미끄러진다든가 할 때는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성사됐다는 결과가 아니라 흘러가는 과정에서 내가 올바른 태도와 자세로 일에 임하고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비단 일 뿐만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 목표에 대해 고민이 부쩍 많은 연초에 테니스를 취미로 즐기고 있다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 며칠 그런 생각을 하며 코치님을 보니 그가 정말 엄청 위대한 랍비처럼 느껴졌다. 레슨 막바지에 그가 한마디를 덧붙이기 전까지는.

     

 “근데 동네에 같이 레슨 받을 친구 없어? 테니스는 같이 배우는 게 재미있는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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