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 되기는 되겠죠
시험이다.
누구도 공정성에 시비를 못 붙일 방법. 시험밖에 없다. 애초에 그러려고 유학시험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한참 대화 중이었다. '저 캐비닛 안에 있는 서류 갖고 와주세요.' 티브이를 보며 한참 이야기하고 있던(또는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주제에서 한참 떨어진 말을 내뱉었다. 오싹한 기분이 들어 남편을 돌아봤다.
"여보, 나한테 한 말이야?"
남편: 응? 무슨 말?
"방금 나한테 캐비닛에서 서류 갖다 달라고 했잖아."
눈꺼풀만 꿈벅꿈벅하며 그런 적 없다는 남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불쌍한 사람. 이야기하던 중에 졸고서 일하는 꿈을 꿨다니.
월말이면 사무실 라꾸라꾸 침대에서 밤을 새우는 생활이 늦은 나이에 몸에 무리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잠깐이라도 떠나 쉬고 싶어 했다. 당시 육아휴직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과 같았던 터라 유학시험을 보기로 했다. 밤을 새워서 일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낫다는 비장함으로.
그에 맞춰 시작되었다. 쉽지는 않았다. 부처 내 추천은 부처 내에서만 경쟁하면 되었다. 마침 그 해는 젊은 사무관들이 일찍 유학을 다녀와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기준으로 유학 대상자가 추천되었다.
내가 지원한 나라에 지원할 예정이라는 선배님과 통화하게 되었다. 남편처럼, 선배님도 가족과 함께 유학을 가실 계획이라 시는데 굳이 선배와 경쟁해서까지 유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부처 내 경쟁이 아닌 전 부처를 대상으로 하는 자율경쟁으로 지원처를 변경했다. 물론 부담은 됐다. 전 부처 공무원이 지원하는 자리를 두고 시험을 보는 것이니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경쟁이었다.
면접도 봤고 필기 전형도 거쳤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냐면 당시 면접을 보러 갈 때부터 서장님께서 몇 번이나 이런저런 코치를 해주셨을 정도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마음 써주시지 않길 바랄 정도로. 정 많던 서장님 잘 지내시는지 전화 한번 드려야겠다.)
얼렁뚱땅 영어 인터뷰를 마쳤다. 턱이 숨에 찰 정도의 턱걸이 수준으로 부처 경쟁 고개를 넘었다. 뭐든 합격이면 되었다. 문 닫고 들어가는 것은 노력대비 최대 성과 아닌가.
우리 청으로 T.O를 따왔지만, 유학시험 발표가 상당히 늦어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는 시간이 빠듯했다. 9월 말부터 시작되는 미국 대학원 지원서 접수 마감은 대체로 11월에 정점에 달하고 12월이면 마감되었다.
처음으로 지원한 학교의 원서마감일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유학대상자들이 함께 교육을 받을 때였다. 마무리되지 않은 지원서를 작성하며 교육원 컴퓨터실에서 밤을 새웠다. 처음 지원하는 학교라 에세이도 개발새발이었다. 혼자 끙끙대며 작성했던 에세이를 들고 조언을 받고자 찾아갔던 선배님부터 교수님까지, '우리야, 이번 지원은 늦었지만 다음번에는 이렇게 쓰면 안 된다.' 하셨으니 객관적으로도 분명 되기 어려운 입학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0.00001%의 확률조차 없어지는 것 아닌가. 내가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최소한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했다. 11월 1일 마감이었고, 미국시각으로 11월 1일 밤 11:59이 가까워져 제출 버튼을 눌렀다.
기대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한참 일을 하던 4월경, 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던 그 학교에서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8월부터 시작되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참석해야 했다. 미뤄보고자 갖은 부탁을 다하는 메일을 보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같은 반 원우들과 함께 시작하고 공부하며 원우애를 쌓는 것도 해당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중요한 목표라고 했다.
남편은 바쁜 와중에도 주말이면 영어학원을 다녔지만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아 가능할지도 모를 약속을 했다. 먼저 가 있으면, 유학시험에 합격해 갓 돌 지난 아이를 데리고 따라오기로. 그렇게 오른 유학길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한국은 한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이산가족이 된 각자의 삶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