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그녀도 그랬습니다.
휴가 중이었다.
갑자기 생기는 현안 업무들로 몇 번이나 미루다 오늘부터 겨우 시작된 2일 동안의 여름휴가였다. 모든 직장인이 출근했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했다. 그것도 잠시. 주변 카페를 검색하는데 불길한 전화번호가 뜬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은 전화기를 타고 회사 동기가 이야기한다. 민원인을 상대하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진 동료가 운명을 달리해 장례식장을 가려한다고.
충격이었다. 어제 작고한 그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지만, 민원인의 불만은 세무서 직원들 대부분이 겪는 일상이었기에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소리 지르는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고 차를 권하는 친절한 공복이 아니던가. 만취해 칼과 세금고지서를 들고 찾아온 한의사 선생님을 임신한 몸으로 응대한 기억이 있는 나에게 그녀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하필 그때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을 뿐 누구도 그녀가 될 수 있었다.
조문을 가야 하는지 고민됐다.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던 동료의 장례에 휴가 중에 가는 것도 지나치다고 설득해 봤지만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휴가도 챙길 수 있다는 논리는 부끄러워 일어섰다.
국가 지정 공무원 공식 작업복인 사계절 검은 양복은 넉넉했지만 휴가 기간을 앞두고 땀에 절은 여름 양복을 세탁해두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 가을용 검은 바지를 주섬주섬 찾아 입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땀이 차, 도저히 지하철을 타고 안산까지 갈 자신이 없다. 카카오 택시를 켜니 3만 9천1백 원. 지하철을 타고 가면 1시간 10분, 택시를 타면 42분.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까지 고려하면 택시비가 아깝지 않다. 게다가 나는 지금 휴가 중이 아닌가. 카페에서 마셨을 아메리카노, 친구들과 저녁 식사 한 끼 했을 비용을 내고 택시를 타기로 했다.
반쯤 눈이 감긴 상태로 한참을 가다 눈을 떠보니 아직도 고속도로 위다. 그렇게 몇 차례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고서야 내린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검은 양복, 흰 셔츠 행렬을 지나, 길게 줄을 선 근조화환들을 거쳐 장례식장안으로 들어섰다. 지금껏 만나본 적 없던 이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고 절을 했다. 인사를 건네는 상주는 시아주버님이라고 한다. 황망한 소식에 놀라고 지쳤을 그녀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앉아있는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오랜만에 뵌 분들과 악수를 하며 빈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를 알고 또 모를 사람들이 왔다 가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있는다. 혹시나 회사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서면 고인과 그 가족이 외롭지 않을까 괜한 생각에 저녁도 먹기로 한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몇 차례 가고서도 장례식장은 가득 차 떠나간 이가 쓸쓸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러 일어섰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데 그것이 또한 나를 위한 것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므로, 우리는 공복이라 했고, 녹봉을 먹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물론 우리도 세금을 낸다. 아주 투명한 유리지갑에 담아. 재산신고니 뭐니 몇 번씩 검증도 거친다. 말하자면 심한 규제를 받는 노비이지만 동시에 주인인 것이다. 그녀도 그랬다.
마음이 복잡하다. 감정도 잘 정리되지 않는다. 휘적휘적 걸어서 동료들 차에 올라타 동탄역에 내린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집까지 가는 동안 지하철을 잘못 탈 확률 천만 배. 집에 무사히 도착해서야 땀에 절은 가을 양복을 허물 벗듯 얌전히 빠져나온다. 무거운 몸은 침대에 무선충전시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존엄은 공무원이 공복임을 천명한 헌법조차 인정해 준 사실 아닌가. 공노비인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듯 또는 잊은 듯 또는 오랜 세월 권력자로 잘못 알고 살아온 공직자들에게 그 권력은 실은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함을 강조하고 강조하다 이제는 그들 역시 같은인간 종에 하나임을 잊은 것은 아닌지에까지 이르러 시계를 보니 잘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러다 지각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이 늦으면 감찰에 지적되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문제가 된다. 무사안일한 공무원 전체의 문제가 된다. 공무원의 문제는 국가 문제가 된다. 나 하나가 잘못해서 전체가 욕을 먹으면 안 되지. 젖은 생각을 말리고 일어나 씻고 누웠다.
자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할까? 눈에 안대를 채웠다. 자야 한다..자야 한다..겨우 잠이 들 무렵 불현듯 깨달았다.
아참 나 휴가 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