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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Sep 24. 2023

널 선택할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아직도 휴가의 반이 남았다.


뭘 하면 좋을까. 특별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회사에 나가지 않으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K직장인이다. 언제부터였더라. 자랑스런 대한민국 직장인의 삶.


시작은 15년 전. 내 손으로 이뤄졌다ㅡ눈 깜짝할 새. 백여 명이 넘는 동기들과 6개월여 연수를 거치고 마지막 날을 맞았다. 시험 성적과 연수원 성적을 합한 순서대로 한 명씩 차례로 강당 앞으로 나가 원하는 부처에 지원한다. 나머지 모두는 숨을 죽이고, 가고자 하는 부처의 T.O가 지워져 가는 것을 바라봤다.


곧이어 내 순서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처에서 일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제도적 시스템을 만들어서 개인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몇 배나 증폭시키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그럴듯한—사기업에서 받는 봉급에 비하면 적은 월급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은—이유도 있었지만, 오로지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문성을 쌓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해보고 싶은 일도 많았다. 인권변호사, 활동가, 검사, 외교관, 디자이너, 작가 등등 어떻게 이 꿈이 저 꿈과 연결되나 하는 분야를 넘나드는. 제너럴리스트가 되면서도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역시나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지원가능한 부처 중 큰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하는, 그러면서도 전문성이 쌓이는 부처. 정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저 가장 유사해 보이는 답을 정해놓고 앉아있었다.


나가기 20분 전. 마침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기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라면 국세청을 가겠다. 국세청은 지금 아니면 가지 못해. 국세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국세청 근무 후 2년 뒤에 네가 손만 들면 어느 부처로든 갈 수 있을 거야.'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나로서는 이 시점에서의 정답은 명확했다.



뚜벅뚜벅.

국세청. T.O 한 자리가 지워졌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한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곳이었다. 지원을 위해 다양한 부처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아버지 주변 지인들의 친구분들이 근무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한평생 인연이 없을 곳이니까. 재능도 없었다. 숫자에도 약하고 꼼꼼한 것과는 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해외 업무도 해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국(나라 국)세청은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생기지 않던 곳인데. 어딘가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되돌릴 수 없다. 강단을 내려와 앉아있는 동기들 사이 중앙 복도를 가로지르며 숨을 고르고 되뇐다. '지금 아니면 갈 수 없다. 2년 뒤 언제든 원하면 다른 부처를 경험할 수 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한 것은 뭐든 해본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지금 아니면..'  


비장한 마음과 스스로 한 선택에 놀라는 마음 사이 골을 따라 정신없이 흘러가듯 자리에 와서 앉았다. 이후 시간이 꽤 흘러 친한 동기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때도 내 표정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또는 내가 내 생각을 제대로 못 읽거나)



그렇게 홀린 듯이 선택한 첫 직장. 이제 십오년여 정도 지났다. 어린 나이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고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K장녀로 어떻게든 잘 살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살아왔다는 것도 이곳에 와서야 바로 보게됐다.


혼자 잘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어떤 순간 모두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각 분야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짊어지고 살았던 불필요하게 무거웠던 짐을 이곳에 풀고 정착이란 것을 하게 됐다.





돌아보면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는 어머니 도마 소리에 눈을  다짐하는 . 고생하시는 우리 부모님이 한순간이라도 웃을  있는 순간을 선물하려면 내가 잘해야 하는.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데, 착하신 두 분께는 언제 복이 올는지. 번호표도 없이 언제 올 지 모를 복을 기다리기 힘들어 나라도 그 복이라는 것이 오는 소소한 순간들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선택한 삶이었다.


그 선택이 언젠가부터는 너무 무거워져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내가 내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는 때가 많아졌다. 이 삶이 습관이 되어버려 이제는 어떻게 이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모르는 때였다.


나이 서른을 바라보며 다시 선택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곳. 나보다 뛰어난 직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보기로. 그렇게 십오 년 동안 이 회사에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상처도 위로도 받았다. 즐겁고 기쁜 일도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문득 깨달았다. 맞춤형 신의 직장에 다니고 있음을.


세무조사를 하며 검사가   있었고, 세금 관련 소송과 심판에 참석해 변호사처럼 이기는 성취감도 느낄  있었다. 다른 나라와 세금 이슈에 협상하고, 재외 동포 기업인들을 위해 공관에서 일하며 외교관이  수도 있다. 어렸을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해볼  있는 곳이었다.


세법도 무궁무진해 다른 세목의 세법과 매해 새롭게 개정되는 세법을 접할  있었다.  변화하고 배우는 . 꿈의 직장 아닌가. 팀과 서를 운영하며 조직 운영을 배우지만 세무 전문가가   있는 곳이었다. 제너럴리스트이자 스페셜리스트가   있는.




알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지만 바라는 세상이 뚜렷하다면 —설사 지금 당장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을 것만 같아도(완벽한 사람이 나만 사랑하거나 전쟁에서 너도 나도 모두 이기는 것과 같이)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떻게 갈 지도 어느 길이 그 길인지도 모른다. 그저 성실하게 걷다 보면 잘못된 길에 들어섰나 했다가도 결국 그곳에 도달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만난다.


불타는 투지와 치밀한 계획으로 일궈온 삶은 아니었다. 바라고 꿈꾸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선택하게 되는 삶이었다. 분명 잘못 들어선 길인데 오히려 그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가야할 길을 가게 된 적도 많았다.




네가 내게 그랬다. 국세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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