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결연한 마음을 먹고 그토록 존경해마지않던 팀장님께 나아갔다.
공손하고 결연하게 두 손을 맞잡고 말씀드렸다.
'팀장님, 내일부터 여름 휴가를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님의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두 눈이 동그랗게 그 모양을 바꾸는 것을 바라보며 여기서 물러서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흔들리는 동공을 꽈악 동여잡았다.
'우연히 땡처리 티켓을 잡았습니다. 지금 아니면 이 가격에 필리핀까지 갈 수 없습니다. 팀장님’
꺾이지 않을 단호함. 팀장님께서 두 눈에 가득하던 놀라움을 내려놓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많았는데 잘 다녀와.'
역쉬.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좋은 사람 보는 눈이 있지. (나는 생년상 어쨌든 MZ다.)
다음 날 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잘 곳을 찾아야 했다. 바쁠 것 없다. 중요한 것을 결정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다. 공항에 앉아 묵을 만한 숙소를 검색했다. 머물기 깨끗하다는 게스트 하우스 확인은 마쳤지만 당일 예약은 불가능했다. 공항 주변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찜질방이 있다니 하룻밤 머물기 제격아닌가.
아늑하고 안전한 밤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떠난 필리핀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까페에 앉아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속하지 않는 자유. 생판 처음 본 이방인인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인사를 받으며, 태어나서 처음 방문한 도시 마닐라가 어느새 좋아졌다. 사람들이 좋으면 어디고 짐을 풀고 마음이 씨앗을 내려버린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경한 광경도 많았다. 큰 음식점, 쇼핑몰에는 총과 방탄복으로 무겁게 무장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경찰로는 치안이 부족해 따로 비용을 지불해 사설 경호인력을 둔다고 했다. 경찰이 슈퍼마켓에 있는 모습을 보면 무슨 일이 생겼나 웅성웅성 의아해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낯설 수 밖에 없음에도 그것이 뭐라고 며칠 있는 새 무장한 사람들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나를 형성하던 내 문화, 내 양식, 내 사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좋아 그 세계가 좋아진다고 해서 내 세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문화를 짊어지고 새로운 세계에 온 것이다.
이 곳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그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곳이 아무리 좋아도 나라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 순간 아주 문득 깨달았다.
서로 낯설지만 공존하며 이해하고 섞이다 더 나아지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밤 12시가 가까워 오면 으레 자리에서 일어나는 후배들에 대한 선배들의 이해(당시 내가 속한 대학반에는, 술자리가 서로의 친목을 위해 강요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암묵적 문화가 있었다.)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기본은 폭탄주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소주 마실까?'가 자연스러운. 서로 긴 말은 하지 않더라도 그 시간을 내주는 것이 이미 위로가 되는 곳.
함께하는 이들을 좋아하게 되고 그들의 언어가 들리기 시작하며 이 조직 문화가 이해된다는 것이 혼란스러울 지점. 나를 버리고 다른 그 무엇이 되기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넓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나니.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
혼자서 걸어왔던 분명했지만 좁았던 세상이 함께 걸어가는 다른 세계를 만나 확장되는 것이다. 나조차 몰랐던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하고 나를 만난 그 세계 역시 더 커지기도 하면서 서로가 서로로 인해 풍성해지는 것이다.
나와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날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 나와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달라지는 내 모습 역시도 나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절대로 사고가 나선 안되는 비행기를 탔다. 가야할 곳이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