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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우석 Mar 21. 2020

어리석음과, 질투와, 그리고 나이키

나의 농구화 이야기 -에어맥스 업템포 95'

에어맥스 업템포 95

이렇다 할 수집벽이 없는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NBA 카드를 모았었고(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다), 커서는 농구화를 사모은다. 근데 이건 수집이라기보다는 그냥 신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나는 모든 농구화를 Active Roster에 등록하여 로테이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신지 않는 농구화, '소장용'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박스 떼기에 담겨 리셀이나 기다리는 신세의 이쁜 쓰레기는 없다.


농구를 좋아한 지가 엄청 오래되었기에 그간 나는 꽤 많은 농구화들을 신어왔다. 대부분은 나이키였고, 고가의 제품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를 사면 애지중지하며 오래 신었다.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보면 신었던 농구화들은 나에게 저마다의 스토리로 남아있을 것이다. 위 신발, <에어맥스 업템포 95>는 그런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처음으로 신었던 고가의 운동화였기 때문이다. 인스타에 간략하게 올렸던 감상을 다시 정리해본다(나의 농구화 이야기에 순번을 붙여 연재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1이라는 글자를 쓰는 순간 2를 써야 한다는 압박이 싫어 일단은 하나만 쓴다).


현재까지 살면서 운동, 특히 구기에 있어서는 종목을 불문하고 뭔가를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주력의 변화는 있었다. 주력은 축구에서 농구로 옮겨 갔는데(축구도 항상 잘했다는 얘기다), 그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 신발을 보니 그때가 1995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신발과 동일한 모델은 1995년 당시에도 '에어맥스 업템포'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나는 트리플 블랙 컬러를 샀던 것으로 기억하고, 이는 밀레니엄 킹스의 왕 크리스 웨버의 시그니처 슈즈였다(당시엔 워싱턴 소속). 93년 1번 픽으로 느바에 입성한 크리스 웨버는 개인적으로 역사상 가장 잘 생긴 NBA 선수라고 생각한다. 크리스 웨버와 견주기 위해서는 핸섬 타이거즈의 차은우가 등장해야만 할 것이다(물론 차은우는 압도적이다). 


나는 농구를 잘했지만 그 흔한 농구화 하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할 때도 변변치 못한 스포트 리플레이 단화를 신고 플레이했던 나였다. 우리 집은 뭔가를 잘했을 때 보상을 주는 형태의 집안은 아니었고(교육비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나는 그에 대한 불만을 꽤 오래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95년 당시 이 신발을 내가 손에, 아니 발에 넣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이면서도 잊기 어려운 뉴스라 할 것이다.


당시의 나는 다소 이른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신발을 사달라고 하고 당연히 예상되었던 안된다는 답변을 받고는 당연하지 않은 반응으로 부모님에 대항했다. 말을 잘 듣던, 공부 잘하던 아들이 땡깡을 부리니 부모님은 다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내 동생은 이제 태어난 지 2년 된 상황, 9살 차이 장남의 육아 도움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내 역할과 책임이 컸던 만큼 나는 그에 합당한 대우(인센티브)를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난생처음 부모님이 큰 마음먹고 사주셨던 신발이 바로 이 모델이었다. 당시 파격적인 99,000원이라는 가격에 판매되었던 업템포는 역시 파격적인 89,000원에 판매되던 아디다스 엑신의 라이벌이었다. 우리는 이제 곧 신발이 10만 원이 넘겠네 낄낄낄 하며 농담을 하곤 했다. 친하게 지내던 내 친구 두 명은 엑신을 선택했다. 엑신은 에어에 구멍이 나있는 제품이었고 걸을 때마다 푸슉 푸슉 소리가 났다. 에어를 과시할 수 있게 고안된 것이었다. "니꺼는 소리가 안 나네? ㅋㅋㅋㅋ" 엑신파의 핀잔은 굴욕적이었다. 


그게 부러웠던 어린 나의 고민은 심대했다. 나는 왜 이 신발을 골랐지, 나이키는 왜 아디다스처럼 에어를 소리 나게 못 만들었을까, 에어란 게 본디 공기라는 뜻이라면 당연히 공기가 들어갔다 나왔다 소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닌가, 급기야는 크리스 웨버가 멍청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서는 이 신발의 기능을 의심하게 된다. 점프력이 상승하는 느낌도 없었는 데다가 이 신발은 엑신보다 무려 만원이나 더 비싸기까지 했더랬다.


그날 밤 나는 송곳으로 신발 에어 뒤쪽에 미세한 구멍을 냈다. 고백하건대 구멍은 3개였다. 이제 내 신발에서도 푸슉 푸슉 소리가 난다. 내일 애들한테 들려줘야지, 물론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할 것이다. 나도 소리 나는 에어 신발을 갖게 된 이후로 내 생각과는 달리 그 공기 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모래밭에서 농구를 하던 시절,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둔탁해지기 시작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쯤, 내 신발의 에어는 전부 깨져서 걸레짝처럼 변해있었다. 인생 최초로 부모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고가의 신발을 망쳐버린 건, 나의 어리석음과 질투, 그리고 나이키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때의 내가 몇 년도의 나인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흘렀다. 나이키는 이 신발을 리트로 하면서 <에어맥스 업템포 95>라고 연도를 적어두어 신발과 연도를 모두 헷갈리던 나를 안심시켰다. 충격적 이게도 나이키 팩토리에서 50퍼센트에 추가 15퍼센트 할인을 받으니 8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이 신발을 구매할 수 있었다(10만 원 예산에서 남은 돈으로 바지를 샀는데 10만 원이 안됐다). 다시 언급하자면, 25년 전에 99,000원 하던 그 신발이다.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발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애초에 에어에서 소리가 나야 한다는 게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내가 이 신발에 송곳을 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플레이용으로, 워킹용으로 그 후에는 그냥 소장하고 추억하면서 오래오래 사용할 예정이다.


오늘의 나는, 어리석음을 극복하였으며, 더 이상 질투할 대상도 없고, 결정적으로 나이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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