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늘어진 푸른색 티셔츠가 그립다

by 우선열


목 늘어진 티셔츠,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가 한결같이 주부들의 데일리 룩이던 시대가 있었다.

같은 골목 동네 아줌마들이 비슷한 옷들을 입고 다니더던 시절이다.

그 옷들은 한결같이 크거나 작았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입던 옷이었기 때문이다.

낡고 색이 바래서 전 주인들이 차마 더 입지 못했던 옷들은 주부들의 차지가 되었다

출근 룩, 데이트룩, 등원 룩, 잠옷, 노동복, 할 것 없는 전천후 데일리 룩이었다

" 밖에 나가 봐, 얼마나 예쁜 여자들이 많은데···, 그꼴이니 남편이 바람이 나지···"

철부지 남편들이 바람피우는 단골 이유였다

그런 말에도 눈 하나 깜빡 않던 여자들이 잠시 옷장 앞에서 서성이며

옷장을 뒤적이는 날은 아이들의 학교 가는 날이었다

아이들의 기를 살리기 않기 위해 예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없던 옷이 옷장 앞을 서성인다고 나올 리 없었다

엄마들은 뒤에 숨어 있어야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비 맞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우산을 들고 한달음에 학교 앞으로 뛰어왔건만

엄마의 몰골을 본 아이들이 모른 척 지나가던 그런 세월이었다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그 시절엔 아이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복 한 벌로 삼 년을 버티는 일이 다반사였다

도포자락처럼 큰 옷을 입고 입학하여 배꼽이 드러날 정도가 되면 졸업이었다.

하복과 동복, 두벌이면 삼 년이 지났다

몸에 옷을 맞춰 입는 게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춰야 했다.


단벌 신사였던 예전에는 어쨌거나 고민할 필요 없었다

빨거나 다림질을 하거나 간단한 손질로 준비 끝이었는데

요즘엔 옷장에 쌓인 옷들을 뒤적여 봐도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

출근 룩, 데이트룩, 등원 룩, 커플 룩 시밀러 룩, 등 온갖 형태의 옷들이 난무하고 있는 시대이건만 옷

장 앞에 서면 여전히 입을 옷이 없다


출근복과 외출복이 다르며 잠옷과 일상복, 작업복, 운동복이 다르다.

하다못해 등원 복도 있다지 않은가

집 앞까지 오는 아이들 학원차에 아이를 태우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한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무릎 나온 운동복 바지 하나로 만사 OK이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립다.

이건 다분히 개인적인 성향일 수도 있다


젊어 한때, 30대쯤이다.

막냇동생의 체육복이 마음에 들었다

동아리 체육대회에서 입고 벗어논 동생의 체육복은 타월 같은 순면의 하늘색이었다

면의 감촉이 좋았고 연한 하늘색이 마음에 들었다

길이가 길어 엉덩이를 덮으니 다른 옷과 매치 시키느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늘어진 목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늘어진 목이 신경 쓰였다

처음 빨래를 해 놓았을 때는 빳빳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후줄근해지고 만다

면의 특징이다.

'다신 '안 입을 거야' 했다가 빨아 놓은 옷을 보고

"한 번 더 입어도 될 거 같은데, 이번만 입자" 하면서 손이 가곤 했다

긴소매 면 티셔츠였으니 사계절이 따로 없었다

여름엔 소매를 둥둥 걷어입었고 겨울엔 겉옷 하나 더 걸치면 되었다

당시엔 결혼이 늦은 내가 온 가족의 골치거리였다

주말이면 가족들의 채근으로 인형처럼 차려 입고 선보는 자리에 나가야 했다

그날은 소개팅이 있던 날이었지만 오전에 볼일이 늦게 끝나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목 늘어진 동생의 파란색 운동복을 입고 가야 했다

'늦는 것보다야 낫지, 겉치레가 중요한 사람이면 내가 싫어' 그

럴듯한 핑계도 만들었건만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친 상대방의 항의를 들어야 했다

엄마는 그날 당장 내 옷을 벗겨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렇게 푸른색 운동복과 이별했건만 아직도 그 옷이 그립다

평상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가벼운 산책을 갈 때, 혹은 하루 정도 묵다 오는 여행에도

요긴하게 입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옷을 사러 나가게 되면 은연중에 파란색 면 티셔츠를 살펴보지만

타월지로 된 옷은 목욕가운이나 비치가운 정도가 대부분이다.

목 늘어진 푸른색 티셔츠가 오매불망 내가 찾고 있는 데일리 룩이다

수백 벌의 옷보다 마음에 드는 옷 하나가 소중하다

목 늘어진 동생의 운동복, 푸른색 티셔츠가 그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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