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많다. 어디서나 쉽게 잠들고 오래 잔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일각이 아쉽던 시절에는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이었다
방학에 사촌들끼리 할머니 댁에 모여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도 제일 먼저 잠들어 버리곤 했다
단숨에 푹 잔다.
시끄럽거나 낯 선 환영이거나 가리지 않는다.
새로운 돌비시스템이라며 음향을 자랑하던 영화관에서 나 혼자 잠든 적도 있다
물론 영화가 재미없었다.
폭력과 욕설이 뒤범벅이 된 내가 싫어하는 영화였다
단체 관람이어서 혼자 빠져나오기도 민망했는데
보기 싫다고 생각한 순간 잠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친구들은 아직도 그 얘기를 전설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민망한 순간도 많다
목사님 설교 시간에 쏟아지는 잠,
중요하지만 재미없는 강연에서도 잠은 여지없이 쏟아진다
지하철에서도 앉기만 하면 졸고 있다
이건 차멀미의 일종이기도 하다
차멀미마저 잠투정으로 변해버린다.
나이 들어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나와는 무관하다
여전히 쉽게 잠들고 많이 잔다
다만 수면의 질이 다른 것 같기는 하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버렸는데 나이 드니 작은 기척에도눈을 뜬다.
금방 다시 잠들어 버리는데도 수면의 질이 나빠지는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을 자도 초저녁부터 꼬박꼬박 졸고 있다
"어머니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얼마 전까지 어머니께 해드리던 말이다
"안 잤다" 하시던 말씀까지 닮았다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있건만 TV 시청을 한 건 아니다 졸고 있다.
잔 건 아니다
10시가 넘으면 그때부터 정신이 초롱초롱해진다
밀린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다.
그 시간에 잠드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말이 있기도 하고 네시 기상을 위해서는 그 정도는 자야 할 것 같다
초저녁에 서너 시간 졸고 있었건만 피로가 풀리는 수면은 아니다
병든 닭처럼 존다지 않는가? 꽤 많은 시간을 졸거나 자고 있지만 수면시간이 부족하다
"잠이 많은 게 복이야, 불면증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
지하철에서 졸고 있다가 민망해하는 내게 친구들이 하는 말인데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친구들도 잠시 졸기는 한다
자신들이 졸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기는 하다
며칠씩 잠을 못 잤다며 하소연하는 친구들 앞에서 잠이 많다고 불평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꼬박꼬박 조는 모습은 고치고 싶다.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니게 어정쩡하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지도 않다
젊은 시절 잠시의 낮잠은 달콤했다
묵은 피로까지 털어내는 묘약이었는데 지금 초저녁 조는 시간은 피로를 가중시킨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게 몸이 무거워진다
고칠 수 있다면 고치고 싶다
초저녁에 졸지 않고 10시쯤 잠드는 건강한 수면 습관을 찾아오고 싶다
평생 많은 잠과 싸워왔는데 이번에는 승산이 없어 보인다
자도 풀리지 않는 피로 때문이다
이제는 달래는 수밖에 없다 오래 써서 노후화된 몸을 인정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숫자가 공평하지는 않다
천석꾼의 만 원과 소작농의 만 원이 같을 리 없다
어린 시절의 잠과 지금의 잠이 같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