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덥고 긴 여름이다.
윤달 탓이라 한다. 음력으로는 이제 겨우 칠월 중순, 추석까지는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 절기상 백로라 하지만, 계절은 좀체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이맘때 새벽은 서늘하여 카디건을 걸치거나 따뜻한 차를 준비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선풍기를 켜며 맞는다. 열대야에 시달려 밤새 에어컨을 켜던 날들을 떠올리면, 그래도 조금은 서늘해진 듯하다. 이제는 가을맞이 준비를 할 때다.
여름꽃 상사화는 막바지 꽃을 피우고, 가을꽃 꽃무릇은 이제 절정을 맞는다. 닮은 듯 다르다. 한여름 내내 진홍빛으로 백일의 안녕을 기원하던 배롱나무꽃은 빛을 잃어가고, 대신 해바라기가 여전히 노란 집념을 뽐낸다. 태양을 좇는 해바라기의 고집 속에서 일조량의 차이를 실감한다. 가을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오고 있다. 아직은 여름 더위라 투정해 보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어느새 성미 급한 나뭇잎이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여름이 치열할수록 단풍은 곱고 열매는 실하다. 그러나 나는 더위를 핑계로 게으름을 부렸으니, 보잘것없는 열매가 부끄럽다. 그래서 이맘때면 마음이 쓸쓸해지는지도 모른다. 백로라 하지만 추석은 늦고, 아직 남은 날들이 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계절을 붙잡고 싶어진다.
“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니.”
탄로가의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붙잡아야 할 것은 흘러가는 계절이 아니라 덧없이 지나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서양 시인 또한 “하루만 더 남국의 날이 남기를” 간구하지 않았던가.
백로에 더위가 남아 있다고 계절을 탓할 일은 아니다. 하루 더 여름이 머문다면, 그것마저 누려야 할 선물이다. 선풍기를 켜며 맞는 백로의 아침, 그 하루가 더욱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