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만나자' 약속을 했지만 약속이 지켜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시간도 장소도 없는 약속이었다. 그날 고조된 분위기를 달래려는 임시 처방이었을 수도 있겠는데 정작 무엇 때문이지 기억도 없다. 시답지 않은 사춘기 시절의 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니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는 걸 서로에게 암시한 일이었다.
뜻밖이기는 했다. 저녁 외출을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집 근처야, 잠시 볼 수 있어?" 전화가 왔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지만 잠시 망설이기는 했다. 저녁 외출이 내키지 않았다. '집 근처잖아, 늦기 전에 돌아오면 돼' 혼잣 말을 하며 집을 나섰다. 거리는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이었다. 상큼한 찬 기운이 싫지 않았다. '나오길 잘 했네' 저절로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다 올려 다 본 하늘에 하얗게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달빛은 아직 남은 햇볕의 위세에 가려졌지만 모양은 형형한 보름달이었다. 10월 보름이었다. '10월 보름이었구나. 날짜 가는 줄도 몰랐네, 10월 보름엔 팥죽을 먹어야 하는데'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혼자 추억에 잠긴다.
그 해 10월 보름달은 유난히 밝았다. 눈 때문인지도 몰랐다. 너른 운동장에 흰 눈이 쌓이고 마침 방학이라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순백의 세상이 펼쳐졌다. 밝은 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세상이 반짝이는 듯했다. 큰어머니는 우리 오 남매를 마당에 세우시고 바가지에 든 팥을 눈 밭에 뿌리며 "그저 그저 우가 네 자손 무탈하게 하시고 공부 잘하게 하시고···"주문을 외우셨다. 철부지였지만 큰어머니의 간절함이 전해져 경건해졌다. 흰 눈에 점점이 붉은 팥이 박히고 내 가슴에도 화인이 찍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가네 자손이었다 .' 10월 보름달을 이렇게 보다니 ···좋은 일이 생기겠네' 그날의 주문이 내게로 오는 듯했다
"오늘이 10월 보름이야, 오다가 보름달을 보았어. 볼래? 사진 찍어 두었거든" 우리는 다시 사춘기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희희 낙낙 해졌다 "눈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콧등에 차가운 기운이 스친 것도 같아 올려다 본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조금 전에 본 보름달은 자취도 없었다.
펑펑 흰 눈이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거리엔 흰 눈이 쌓이고 지나는 이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첫눈 오는 날 만나자더니 약속 지켰네", "그러게,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렇게 지켜지는 약속도 있구나" 사춘기 시절에도 지키지 못했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는 약속을 지킨 날이었다. 보름달과 첫눈을 한꺼번에 본 날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면 믿기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일이었다.
"아직은 길이 미끄럽지 않아" 친구가 앞장서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어지러이 찍히는 발자국들. 세상사도 이와 같지 않을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좋다. 보름달이 환하던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갑자기 흰 눈이 펑펑 쏟아질 때도 있다. 어지럽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갈 수는 있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도 이루어질 수 있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 뜻밖의 환희가 될 수도 있다. 마음속에 간직한 화인 하나,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