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글감, 기록.
나는 2006년 3월 14일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군복무가 시작된 날이지만 나는 그때를 내 첫 직장생활로 생각한다. 노동 여건은 물론 좋지 않았다. 야근을 거의 매일 했고 한 달에 5~6회 당직을 섰으며, 군역을 마치는 날까지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적으로 힘든 날들도 많았다. 2007년 12월 3일에 총기 사망 사고를 직접 봤고, 그 후속 처리 과정에서 군대라는 조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인지를 날 것으로 목도했다. 그래도 나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 업무 비망록을 꽤 정성들여 작성해놓고 군역을 마쳤다.
두 번째 직장에서는 업무 비망록을 쓰지 않았다. 후임자에게 간단한 인수인계서를 넘긴 게 전부였고 그것도 거래처 담당자 연락처와 주요 매출 현황만 짧게 기록한 것이었다. 세 번째 직장에서는 참고자료만 그대로 넘겨주고 왔다. 취재 현장에서 얻은 보도자료와 각종 토론회 자료집을 책장에 꽂아놓고 '이거 참고해' 라는 말만 후임자에게 전했다. 네 번째 직장에서는 '신뢰가 없으면 생산성도 없습니다'는 딱 한 줄만 업무보고 공유파일에 적어놓고 나왔고, 다섯 번째 직장에서는 그것도 마땅치 않아 '몸 건강하세요' 라는 말만 짧게 하고 떠났다.
네 번째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뭔가 조금씩 쓰고 싶어졌다. 동료들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고 업무 현장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싶었다. 그간 읽었던 책을 기반으로 해서 내가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듣고 손으로 직접 만진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업무용 수첩에 몇 자 적기는 했지만 반성을 위한 진지한 기록이 아니었고 그날그날 해치워야 할 작전 목록 같은 게 대부분이었다. 아직 이 수첩들을 가지고는 있으나 여기에 뭔가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어 마냥 박아 두고만 있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마음 상태가 사뭇 다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찍 출근하거나 비번임에도 회사에 가는 짓은 아예 하지 않는다. 지문을 찍어 퇴근 기록을 남겨 놓고 또 일하는 짓은 아예 하지 않으며, 대체 휴무에도 굳이 회사에 기어나가 내 돈 주고 밥 사먹으며 일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요즘은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한다. 말도 별로 안 하고 내 할 일만 한다. 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더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선될 것 같으면 몇 번 얘기하고 별 반응이 없으면 그런가보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글감으로 기록하고 있다.
강민선 작가의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를 읽었다. 내가 도서관 사서도 아니고 또 사서가 될 것도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 뭔가 아이디어가 솟을 것 같아 며칠동안 차근차근 읽었다. 기대대로였다. 글감을 발견했고 새로운 영역을 발견했다. 당장 내일부터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고 공부로 이어질 수 있는 연결 고리도 찾았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랑가나단의 도서관 5법칙'을 내 일터에 적용한다, 오늘 당장 그만둬도 아쉬울 게 전혀 없다는 심정으로 일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 내 것으로 만든다!
**
부기 附記
1. 강민선 작가의 작품은 이번이 4번째다. <도서관의 말들>과 <하는 사람의 관점>을 2022년 7월과 11월에 각각 읽었고, <끈기의 말들>을 2023년 4월에 읽었다. 이 3권을 읽고는 짧게나마 작가의 문장을 리뷰에 소개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 혼자 고이 간직하고자 한다.
2. 동네 도서관이자 경기도 파주시의 랜드마크인 '교하도서관'에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독립출판물 서가에 비치되어 있다. 다 읽을 자신은 없지만 2023년 4/4분기 독서 목록에 포함시킬 예정이며 책을 읽는 것 이외의 활동, 예컨대 북토크나 저자 사인회 같은 곳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
강민선, <도서관의 말들>. (2022.07.08.)
강민선, <하는 사람의 관점>. (2022.11.24.)
강민선, <끈기의 말들>. (202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