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스페인
스페인의 수도는 마드리드지만, 어쩐 일인지 스페인을 떠올리면 바르셀로나부터 떠올랐다. 축구팀 때문일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건축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지만,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먹여 살리는 도시라는 말은 숱하게 들었다. 궁금했다. 왜 그의 이름 앞에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궁금증을 가득 안고 도착한 바르셀로나는 따뜻했다. 내내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경험한 탓일까, 남부로 내려온 까닭일까. 낮의 햇살은 따사롭고, 해가 지면 선선한 바르셀로나의 날씨 덕분에 걷기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스페인의 최대 관광도시 바르셀로나는 곳곳에 묻어있는 가우디의 흔적 덕분에 걷는 내내 눈이 즐겁다. 가우디의 삶과 남아있는 흔적을 자세히 알고 싶어 가우디 투어를 신청했는데 결과는 대 만족이다. 거리 곳곳에 있는 가우디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여행이 한층 더 풍성해진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나님이 만든 선이다." - 안토니 가우디
직선보다 곡선을 사랑했던 가우디의 마음이 녹아있는 까사바트요와 까사밀러에서는 가우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현란한 색감의 타일아트를 볼 수 있다. 가우디의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제자이자 동료였던 조제프 마리아 주졸 이 지베르트와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가우디 본인은 색을 배합하는 능력이 좋지는 않았기에 실제로 그와 같이 하지 않은 가우디의 작품에는 그러한 타일 장식이 없다고 한다.
나의 것이 아닌 트레이드 마크. 무언가 민망한 상황이다.
알록달록한 구엘공원은 깨진 타일을 모자이크 형태로 붙이는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뱀의 모습을 닮은 곡선 벤치와 파도 동굴 등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화려하고 독창적인 요소가 구석구석 숨어있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을 연상케 하는 구엘공원. 그 때문인지 구엘공원에 들어선 순간 달달한 것이 생각나 주머니에 있는 초콜릿을 하나 까먹었다.
투어사의 깃발을 따라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사그라다파밀리아를 보고 처음 내뱉은 말은 딱 한 마디였다.
"헉!"
목을 다 꺾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건축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롯데타워를 보고도 헉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사그라다파밀리아는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가우디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야심작이라던데, 건축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섬세한 설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882년 착공을 시작해 공식적으로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이 완공 예정인 건축물로 공사 현장마저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사그라다파밀리아. 2026년에 바르셀로나에 다시 갈 이유가 생겼다.
성당이 완공되면 예수를 상징하는 탑이 성당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설계된 탑의 높이가 172.5m로 완성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 된다. 몬주익 언덕이 173m인 점을 감안하여 하나님이 만든 것은 넘봐서는 안된다는 가우디의 겸손한 의도가 담겨 있는 높이 172.5m. 100년 가까이 공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자들의 헌금과 기부금, 그리고 나 같은 여행자들이 내는 관람료 덕분이다.
탄생과 수난, 영광 3개의 파사드(면)로 나뉜 사그라다파밀리아의 설명을 찬찬히 듣다 보니 가우디가 건축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 한 것 같아서 감사함이 더해졌다. 크리스천인 내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사그라다파밀리아였지만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사그라다파밀리아는 감동으로 다가오기 충분한 건축물이다.
가우디의 양식은 가우디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카탈루냐의 전통 건축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기만의 양식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가히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천재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가우디의 건축물은 그러한 독특함 속에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멋으로 보이는 둥근 천장과 나무 같은 기둥은 무게, 즉 힘의 흐름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됐고, 효율적인 구조가 아름다운 구조라는 개념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건축물의 기능 역시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미장공이나 타일공을 섭외하고 자신의 건축물이 지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건축가로도 유명했던 가우디.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점에서 천재라는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닐까.
바르셀로나를 빛낸 건축가이자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 안토니 가우디. 바르셀로나가 곧 가우디일 만큼 가우디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이보다 적합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번외) 바르셀로나에서 생긴 일
가난한 배낭여행자가 여행하면서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숙소다. female room(여성전용)보다 mix room(혼성)이 저렴하기에 여행할 때 매번 mix room에 묵곤 한다. 최소 6인실부터 많게는 36인실까지 쓰기 때문에 mix room이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일 뿐이고, 그들도 경비를 아끼고자 mix room을 선택한 여행자들이니까.
바르셀로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female room보다 mix room이 저렴했기에 택했던 호스텔. 레이알 광장 한복판에 위치한 숙소였기 때문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어디든 넘어가기 편했던 장소였다. 마침 내가 여행했던 기간이 EPL 기간이라 매일 저녁 로비 스크린에는 축구 생중계가 펼쳐졌다. 오후 8시 이후 파스타 한 접시와 생맥주 1잔이 무료로 제공됐던 곳. 1층에는 클럽이 있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면 공용화장실에는 클럽복장을 하고, 화장을 고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로비에는 축구 보는 사람이 넘쳐나고, 화장실에는 클럽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 노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안성맞춤인 호스텔이었다. 클럽도 술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위치가 좋아서 선택한 숙소였기에 매일 밤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FC바르셀로나와 파리생제르망의 경기가 펼쳐지던 날, 내가 묵었던 기간 중 가장 시끌벅적한 저녁이었다. FC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나자 호스텔 주인은 FCB 승리 기념으로 오늘 하루 생맥주를 무한으로 제공하겠다는 말과 함께 더 요란해진 로비. 술을 먹지 않는 나는 바로 방으로 올라왔고, 귀마개를 착용한 후 잠자리에 누웠다. 몇 시간을 잤을까. 투두두두둑. 갑자기 비가 오는 듯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2층 침대 4개가 놓여있는 나의 방. 나는 1층 침대를 사용 중이었는데 2층에서 자고 있던 남자가 새벽에 구토를 하는 소리였다. 2층에서 1층을 향해 쏟아내니 1층에서 자고 있던 나는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를 빗소리로 오해하고 잠에서 깬 것이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더니 2층 침대남도 그제야 술이 깼나 보다. 침대 계단도 이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뛰어내려 방을 빠져나갔다.
당장 로비로 내려가서 항의했더니 늦은 시간이라 방을 바꿔주는 건 어렵기에 급하게 청소를 해줬지만, 내가 덮고 있던 이불과 옷에도 튀지 않았을까 하는 찝찝함으로 샤워를 다시 한 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바르셀로나에서 마지막 밤이었다는 것.
따사로운 바르셀로나, 2층 침대남의 숙취로 얼룩져버린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