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는 LCC를 타고 이동했다. 기차와 버스 등 여러 선택지가 있지만, 버스와 기차, 저가항공 모두 가격대가 비슷했기에 이동 시간이 짧은 비행기를 택했다. 짐 분실이 많다는 부엘링을 타고 2시간 만에 도착한 도시.
바르셀로나보다 따뜻했던 그라나다는 연평균 8.9°C인데, 어쩐지 니스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패딩과 털 가디건을 벗어던지고 배낭 구석에 있던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라나다에서도 mix room을 예약했는데, 바르셀로나의 기억 때문에 추가금을 내고 female room으로 바꾸려 했으나 방이 모자랐다. 기존에 예약한 대로 mix room key를 받고 들어간 방에는 이태리 남자 한 명이 사용 중이었다.
'저 친구도 이따 밤에 토하진 않겠지?'
다행스럽게도(?) 침대는 하나씩 있었기에 혹여나 토하더라도 내 위에서 토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태리 남자의 몸에는 친절과 배려가 묻어있었다. 짐을 줄이기 위해 드라이기를 챙겨 오지 않았던 나는 호스텔에 공용 드라이기가 비치돼 있지 않으면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싸매고 잠들어야 했다. 내게 드라이기가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샤워 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말고 있는 내게 드라이기를 건넸다.
"드라이기 안 가져왔어? 아무리 건조한 날씨라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지 않으면 두피가 상해."
"응 나 드라이기 없어. 근데 밖에 나가면 머리 금방 말라서 괜찮아."
"그라나다에 얼마나 머물러? 나는 여기 일주일정도 있을 건데, 드라이기는 테이블에 올려둘 테니 머무는 동안 편하게 사용해."
뭐지 이 천사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뭘 믿고 본인 물건을 빌려주는 거지?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지어졌지만,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이태리의 친절함인가.'
오랜만에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덕분에 한층 더 보송해진 상태로 거리를 걸었다. 곳곳에 심어져 있는 오렌지나무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호스텔 체크인할 때 궁금해서 물어보니 거리의 오렌지 나무는 공공재이기 때문에 편하게 따먹어도 된다고 해서 한 개를 따봤다.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였기 때문에 까치발도 필요 없을 만큼 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껍질을 까고 오렌지를 하나 먹는 순간 깨달았다.
'공공재인데도 아무도 따지 않고 주렁주렁 매달린 이유가 있구나.'
한입 베어 물자마자 터지는 과즙에 표정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한쪽 눈이 감기고 온몸이 비틀어지는 맛. 레몬보다 신 오렌지였다. 신 과일을 잘 먹는 나인데도 참을 수 없다. 저세상 신맛이다.
그라나다는 작은 소도시다 보니 반나절만에 도시 한 바퀴를 다 돌았다. 그라나다의 분위기는 흙빛이다. 분명 런던과 에든버러처럼 채도가 빠져있는데, 흙색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도시다. 따뜻한 날씨지만 준사막 기후의 특징 때문일까. 자꾸만 흙이 떠올랐다. 왕실성당과 그라나다 대성당을 둘러보는데,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파밀리아를 보고 와서 그런지 큰 감흥이 없다. 처음만큼의 감동이 없다는 것은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그라나다의 매력은 타파스다. 스페인 남부 지역에는 무료 타파스 투어가 있어서 와인이나 맥주를 시키면 타파스 한 접시가 무료로 나온다. 술을 먹지 못하는 내게 논알코올 샹그리아(띤또네베라노)라는 대안이 있었다. 식당별로 제공하는 타파스가 다르기 때문에 띤또네베라노 한 잔을 시키며 타파스 투어로 식사를 대신했다.
샹그리아와 똑같이 생겼지만, 알코올이 없어 달달한 맛. 네 곳의 식당을 방문해 연달아 네 잔을 마시고 나니 논알코올인데도 괜스레 얼굴에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그라나다 관광의 핵심인 알함브라 궁전은 아침 일찍 둘러봐야 한다는 말에 눈뜨자마자 서둘러 채비를 하고 궁전으로 향한다. 성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수기도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덕분에 궁전을 전세 낸 것처럼 혼자 여유롭게 거닐 수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 내에도 오렌지 나무가 잔뜩이지만 아름다운 궁전 내에서 몸을 비틀고 싶지 않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보면 그라나다 시내와 함께 이슬람 마을인 알바이신 지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채도 빠진 빨간색의 지붕이 조화롭다. 밤이 되면 불 켜진 도시의 흙빛은 빠질테니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다. 알함브라 주변 달동네 구시가지의 경사는 상당하다. 유럽 특성상 돌길이 많지만, 그라나다는 죄다 돌로 포장돼 있기 때문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혹여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걷고 있는데, 한 여행객의 캐리어 바퀴가 돌길에 끼었다. 억지로 빼내다 빠져버린 바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도움을 주고 싶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없다. 먼발치에 서서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뿐.
그라나다를 포함해서 유럽은 캐리어를 끌고 올 여행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