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근무지가 가깝네요. 그럼 점심때 커피 한 잔 하며 뵙는 걸로 하죠.]
생애 첫 점심 소개팅이 성사된 순간이었다. 본디 소개팅이란 주말 저녁을 할애해 서로 알아가는 자리가 아니었던가. 내가 착각한 게 아닌지 싶어 몇 번씩 카톡을 다시 들여다봐도 점심이 맞다. 머리 식히기에도 부족한 점심시간 동안 낯선 누군가가 나의 인연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약속한 그날, 우리는 각자 근무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카페에서 만났다. 색다를 것 하나 없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상대는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다. 하루 한 번은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시원하게 들이켜야 기운이 난다고 했다. 그에 비해 내가 고른 메뉴는 따뜻한 페퍼민트티. 시원하게 들이켰다간 목구멍이 타들어갈 음료였다.
직접 만나본 상대는 점심 소개팅이 처음인 나를 되려 신기하게 여겼다. 요즘엔 이렇게 쿨하고 가벼운 만남이 유행이라면서 차가운 얼음을 와그작 삼켰다. 그리곤 농담처럼 스스로를 ‘인코노미스트’라 칭했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人)’과 경제전문가를 뜻하는 영어 ‘이코노미스트(economist)’를 합친 말이었다. 한 마디로 누군가를 만날 때 자신이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최소화하면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거다. 소개팅의 성패는 찰나의 첫인상으로 결정하는 거 아니냐며, 가뜩이나 밥값도 비싸졌는데 저녁에 오래 밥 먹는다고 소개팅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고 했다.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다. 점심때 만나면 이래저래 부담이 덜하다. 번화가 파스타집 대신 사무실 가까운 카페에서 만나면 그만이다. 만나서 무엇을 할지 미리 데이트 코스 짜느라 고심할 필요도 없다. 혹시 맘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더라도 회사 핑계 대고 빨리 자리를 마무리할 수 있다.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 몇 가지만 속전속결로 확인한 뒤 만남을 지속할지 결정한다니. 기존의 소개팅 방식에 비하면 시간이나 비용의 측면 모두 ‘가성비’가 훨씬 좋다. 그야말로 고물가 시대에 딱 맞는 만남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자꾸 삐딱한 생각이 맴돌았다. 머릿속으로 스스로의 값을 매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람에게 나의 가성비는 얼마일까 계산기를 두드렸다. 저녁 밥값이 아깝다 했으니 만원도 안 되는 건 자명했다. 쿨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이대로 있다간 가성비 기준에 잠식당해 나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것이 뻔했다. 결국 식지도 않은 페퍼민트티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타들어갈지언정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다음 주에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가는 거 어때요? 제가 살게요.]
상대의 애프터 신청은 게임 속 레벨업처럼 느껴졌다. 나의 가치가 커피 한 잔에서 떡볶이 한 접시 값 정도로 오른 건가. 또다시 머릿속 계산기가 바쁘게 버튼을 두들겼다. 인간관계마저 가성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제 저만큼의 가치상승은 황송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다음 만남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함께 먹는 식사 메뉴 가격으로 관계의 깊이를 가늠하는 내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은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촌스러운 가치관이라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사람 사이의 인연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조심스레 거절의 의사를 전한다. 행여나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 고민해 보낸다.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 상대의 답장은 금방 되돌아온다. 깃털처럼 가볍게, 그러나 직설적으로.
[그럼 페퍼민트티 값 4,500원 보내주세요. 카카오페이 가능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