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이던 시절엔 승객과 스몰토크 하기가 모토였는데, 은행 창구에서는 합죽이가 되어버렸다.
일단 고객의 요청이 뭔지 파악하고 나면 이후 내가 해야 할 업무에서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밟아야 할 절차 중간에 뭐 하나라도 빠트릴까봐 매뉴얼을 꼼꼼히 읽으며 '실행'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시 또 확인하고 확인하느라 고객과 대화를 나눌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앉아서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객이 말이라도 건네면,
"네... 네... 잠시만요..."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보이스피싱이나 상속, 법인 대리인 업무 같은 경우엔...
그저께도 한 고객이 집중을 요해야 할 업무를 가지고 오셨다.
나는 모니터로 빨려들어갈 듯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가며 업무를 진행하는데 고객이 뭐라 말을 걸었다.
"진상 많죠...? 아까도 기다릴 때 보니까 신입행원이라고 얕잡아보고 뭐라 하는 것 같던데."
"네.. 없습니다(있다고 하면 말 길어지니까 일단 집중 좀 하자)... 괜찮습니다(고객님이 가지고 오신 업무가 안 괜찮아요ㅠ)..."
예전의 나라면 고객이 먼저 물꼬를 틀어준 만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창구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정확한 업무를 위해서라도 조금 무안하지만 고객과의 단절을 택했다. 앞에 있는 고객도 메모지 좀 달라고 하더니 뭔가를 끄적이며 자기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이후 나는 업무가 마무리될 때쯤에야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고객님, 죄송해요. 제가 신입이라 멀티가 잘 안 되어서요. 고객님 일 잘 봐드리려고 집중하느라 대화를 더 많이 못 나눴네요."
고객은 다 안다는 듯이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쪽지를 건넸다.
쪽지에는 "나는 정신과 의사다! 저분은 환자!"라고 쓰여있었다.
잠깐 멍해진 나를 보며 고객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오랫동안 고객들을 응대했는데, 참 많이 힘들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며 일했어요. 우은빈 계장님도 이거 모니터 밑에 붙여놓고, 이렇게 생각하며 일해요. 나는 정신과 의사! 쟤들은 다 환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고객이 어떤 일을 하며 수많은 고객을 응대했는지, 어떤 고객을 만났기에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하며 일했는지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알지 못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알겠다. 잔뜩 쫄아있는 신입행원을 알아보고 토닥여 줄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알겠다.
결국, 똑같다. 승무원일 때도 은행원일 때도. 결국 이런 사람들 덕분에 나도 어디 가서 고객의 입장이 되었을 때, 내가 만났던 고객들을 떠올리며 조금은 더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이제 더는 비행을 이어가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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