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여름 Jun 02. 2018

“요즘 뭐 하고 지내?”

<그럼에도, 나를 사랑한다> 1화


  오랜만에 만나게 된 친구가 이런 인사를 건넨다. 이 의례적 인사를 들었을 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드는가? 떳떳한가? 특별할 것 없는 안부 인사인데도, 이 말은 은밀한 유혹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인사말쯤으로 넘기면 되는 줄 알면서도, 뭔가 그럴싸한 대답을 덧붙이고 싶은 욕구가 슬쩍 치미는 것이다.   


  서로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겪고 있음을 알면서도, 있지도 않은 고상한 취미를 말하거나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하는 ‘가치 있는’ 인간임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학교나 직장을 마치고 돌아와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하는 행위조차 없이 산다고 얘기하면 저 사람은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이런 두려움은 꽤 흔하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수롭지 않은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낀다. 몰두하고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하면 마치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무가치한 인간임을 자백하기라도 하는 듯 씁쓸함이 남는다. 설령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의미한 매일을 살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대답하길 주저한다. 무가치한 인간으로 보이기 싫어서다.   


  우리는 세상이 결과 아닌 과정에 값을 쳐줄 생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느라 방황하는 중”이라는 말은 허황된 포장 같아 입 밖에 내기도 겸연쩍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치환하는 일이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는 과정이건 눈에 드러나는 결과가 없으면 잉여 인간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차라리 스스로 잉여임을 고백하며 방패를 두르는 것이 속 시원할 때도 있다.    


  그마저도 싫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가치한 잉여인 나 자신으로 다른 사람을 대면하기가 껄끄러워서다. 우리는 결과만 쫓는 타인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무가치함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근원적 두려움에는 전제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가치 없다’라는 전제다.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반대로 행위 하는 인간은 무조건 가치 있는가?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 뭐라도 하는 사람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곧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잉여’라는 용어로 폄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인정받을 수 없다는 심중이 깔려 있다. 사람에게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고, 어디에도 필요하지 않고 남아도는’이라는 뜻을 가진 수식어가 붙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굳이 잉여라고 자칭하지 않아도, 뭔가를 열심히 했을 때는 ‘오늘 좀 뿌듯한데’라고 느끼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냈을 때는 스스로 ‘쓰레기 같다’고 지칭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잉여라는 단어는 생산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곧 생산하는 인간만이 가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인간이 행위를 생산해내야만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환원한 발상이다. 이런 의식은 너무나도 깊숙이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와 있어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쉽게 인지하지도 못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내가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 목표로 달려가는 사람이 떠오를 때면 더욱 그렇다.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해지는 현상은 이미 현대인에게 흔한 심리적 지병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만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친다.    


  무엇이 되어야만, 무언가를 해야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곧 조건적 사랑이고 조건적 인정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한순간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