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를 사랑한다> 5화
세상에 대한 1차적 신뢰는 부모를 통해 형성된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든 아버지든 할머니든 자신을 집중적으로 맡아서 길러준 사람, 즉 주 양육자에게서 온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아이일 때, 우리는 양육자의 태도를 통해 세상이 어떤 곳인지 결론짓는다. 아이에게 양육자는 곧 세상이다. 혼자서 밥을 먹을 수도, 몸을 일으킬 수도, 기저귀를 갈 수도, 기분 나쁜 소음을 피할 수도 없는 무력한 아이는 양육자의 민감성, 성실함, 우호적이거나 무성의한 태도를 보고서 세상을 파악한다. 축축하고 기분 나쁜 기저귀를 차고 누워 있을 때, 양육자가 금방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채고 기저귀를 갈아준다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세상은 내가 뭘 원하는지 바로 알고 잽싸게 들어주는, 신뢰할 만한 곳이구나.’
등에 옷깃이 접혀 불편해서 울고 있을 때, 양육자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해 아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젖병을 물리고, 결국에는 지쳐서 “제발 울지 마! 왜 그러는지 말을 해주든지…”라고 말하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왜 우유를 주는 거야? 나는 등이 불편하다고. 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를까. 세상은 내가 원하는 걸 주지 않는구나. 세상은 정말 믿을 구석이 없는 곳이야.’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 생애 초기에 형성되는 믿음은, 세상이 어떤 곳이 될지를 결정한다. 세상이 믿을 만한 곳인지, 살아볼 만한 곳인지, 내가 뭔가를 원하고 꿈꾸었을 때 가질 자격이 있을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생애 초기 몇 년 동안 형성된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애착 이론에서 말하는 안정애착, 불안정애착을 형성한 사람들은 생애 초기에 형성한 믿음을 모든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양육자에게서 세상은 도무지 믿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면, 앞으로 만나게 되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같은 믿음을 확인할 만한 일만 끌어들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같은 체험이 반복됨으로써 생애 초기의 믿음은 더욱더 공고해진다.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은 조건적 사랑들로 넘쳐난다. 심지어는 아이에게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것 같은 존재인 엄마(주 양육자)조차도 그렇다.
“그렇게 하면 안 돼. 기지 말고 걸어야지. 음식 앞에서 식탁을 치면 안 돼, 음식을 쏟잖아. 아, 네가 조금만 더 얌전하게 굴면 내가 더 사랑해줄 텐데!”
늘 이런 식이다. 양육자의 사랑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사랑해주겠다’ 또는 ‘무언가를 해야만 사랑해주겠다’로 나뉜다. 사랑을 받으려면 뭔가를 하거나,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생아기에 부모의 사랑을 박탈당하는 건 죽음이나 다름없다. 혼자서 몸을 뒤집지도 못하는 영아에게, 사랑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은 매우 위협적이다. 그러니 마뜩찮더라도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면’ 양육자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양육된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한 번도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 것인가.
그러니 조건적 사랑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아마 가장 터무니없는 착각은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인지도 모른다. 조건적 사랑으로 양육된 우리가 자기 자신조차 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시험 성적이 낮게 나오면, 승진 시험에서 누락되면 갑자기 가치 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오랫동안 직장을 못 구하고 있으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나를 비하한다. 누구를 만날 자격도 없는 사람으로 느낀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게 ‘맞는 일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분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데도, 우리는 뭔가를 못할 때 죄책감을 느껴야만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 생산적인 일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마땅히 숨죽이고 주변의 눈치를 봐야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왜 잘못됐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결국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